목표가 명확하면 강인한 추진력을 갖는다
리채윤 CTN/교육타임즈 논설위원
가금현 기자입력 : 2026. 01. 29(목)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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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타임즈 96호. 출처=교육타임즈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CTN]
"부자가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내일 할 일을 오늘 하고, 오늘 먹을 것을 내일 먹어라."
- 유대 속담

올림픽 유치의 전말
“동북아와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국력의 과시, 공산권 및 비동맹 국가와의 외교 관계 수립으로 분단 상황 극복 여건 조성, 국제적 행사를 통한 국민 결집력 유도 등이 올림픽 유치의 필요성이었다. 올림픽 유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논의는 박대통령 시대 말기쯤부터 있었고, 제24회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겠다는 정부방침 발표도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했다. 잘만 하면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디딤판이 되는 것이 올림픽이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박대통령이 불행한 죽음을 당하고, 군부의 권력 다툼과 세력 확장의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긴장과 불안 속에 1980년도를 맞았고, 1980년도를 살았다. 그런 가운데 정부가 올림픽 유치 의사를 정식으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에 신청, 통보한 것이 1980년도 12월이었다. 다음 해인 1981년 3월에는 IOC(각국올림픽위원회), IOC, GAISF(국제경기연맹) 조사단이 와서 개최 여건조사도 하고 갔다. <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 솔>”

위의 글은 정주영의 자서전에 기록된 한국의 올림픽 유치에 대한 전말이다.
어쨌거나 1980년에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다지기 위해 올림픽을 유치해야 한다는 국내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올림픽의 개최는 한반도의 평화정착, 국력의 과시, 비수교국과의 외교관계 조성, 국민적 단절 등 여러 가지 이점이 많아 시기적으로 서울 개최가 매우 절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나고야가 올림픽 유치 경쟁에 뛰어 들자 국내 여론은 서울에서 올림픽을 유치할 가능성이 없다고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1981년 5월 당시 상황으로는 한국이 일본의 나고야를 이기고 올림픽을 유치해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나가서 세계 IOC 위원 82표에서 몇 표나 얻을 수 있겠는가? 대만 표 하나에 미국 표도 둘 중에 하나는 캐나다 동계올림픽 유치에 쓰여질 것이니 기껏해야 우리 표까지 합쳐 서너 표일 것이다.”
이것이 당시 한국의 김택수 IOC 위원의 비관적인 전망이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도 미온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당시 총리 남덕우는 우리가 아무리 거국적인 유치 활동을 벌여도 일본을 제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유치에 성공한다 해도 올림픽 때문에 경제 파탄에 빠질지 모른다 지론을 폈다. 총리의 인식이 그러니 국무위원들도 비슷한 자세들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접수해서 조사단이 개최 여건 조사까지 마쳤고, 더구나 올림픽 개최 추진의지 재확인까지 받은 상황에서 돌연 올림픽 유치 신청 철회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밀고 나갈 수도 없었다.
모두들 나고야와의 표 대결에서 서너 표밖에 얻지 못하는 망신만을 생각했다. 올림픽 유치 업무 수임에 따른 책임이 두려워 모두 의도적으로 올림픽 유치와 관련되는 것을 기피했다. 심지어는 올림픽 개최 신청 당사자인 서울시장까지도 나서기를 꺼려했고, 주무 부처인 문교부도 손을 놓고 있었다.

올림픽 유치위원장 정주영
그러던 중 문교부는 강인한 추진력과 대담성을 가진 정주영이 가장 적임자라고 결정하고 올림픽 유치 추진위원장으로 임명했다.
5월 어느 날, 문교부 체육국장이 프린트한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 사령장을 들고 정주영을 찾아왔다. 체육국장은 올림픽 유치 관계 장관 회의에서 이규호 문교부장관의 제안으로 결정된 일이라고 했다.
“무에서유를 창조하고, 강인한 추진력과 번뜩이는 기지로 '현대' 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저력과 갖가지 신화를 남기면서 해외에 한국 기업의 위상을 제고시킨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회장님께서 이 일의 적임자란 결정을 했습니다.”
듣기 과히 싫지 않은 말을 포장지로 싸서 내놓은 사령장이었다.
올림픽 유치에 대한 대체적인 분위기를 알고 있던 정주영은 어찌됐든 한 번 모여 얘기나 해보자고, 정부와 체육 단체 등의 관련 인사들을 롯데 호텔로 모아 첫 회의를 가졌다. 88올림픽 유치 민간추친위원장 밑에 각부 장관들이 전부 위원으로 들어 있었는데, 그 첫 모임에 나온 장관은 주무장관인 이규호 문교부장관 한 사람뿐이었고, IOC 위원조차도 불참했다. 개최지가 될 서울시에서는 국장 한 사람을 내보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심스러운 첫 회의가 열렸지만 정주영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부의 유치 의사가 어느 정도 강한 것인가, 추진위원이면서도 회의에 불참했던 국무위원들이 과연 어느 정도 협조할 것인가를 이규호 문교부장관에게 물었다.
“올림픽 유치는 대통령의 지시 사항입니다. 안기부장도 적극 지원 약속을 했구요.”
조상호 체육회장, 최만립 총무 등 체육회 사람들은 올림픽유치가 체육회로서는 밑져봤자 본전이라는 입장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형편에 8천억 원이라는 경비가 소요되는 올림픽 개최는 사실 부담스러운 액수였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캐나다 몬트리올이 그전 올림픽을 10억 달러라는 막대한 적자로 끝냈던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모든 일은 인간이 계획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적자가 나게 계획하면 적자가 나고, 망하게 계획하면 망하는 법이다. 유치 못하는 것이 바보지, 유치만 한다면 우리 형편에 맞춰 적자 안 나게 계획해서 얼마든지 치러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지하철이나 도로공사 등은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올림픽 경비로 계산할 필요가 없었고, 경기장도 숙소도 올림픽을 위해서만 다시 지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모든 민간 시설을 동원해서 써도 충분했다. 경기장은 각 도시나 대학의 것들을 규격에 맞게 개보수해서 활용하면 될 일이고, 선수촌은 좋은 부지에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아파트를 지어 미리 팔아놓고 먼저 올림픽에 쓰면 정부의 돈을 한 푼도 안 들이고도 숙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기자촌이나 프레스센터는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새 빌딩을 지을 예정이면 빌딩을 지어 기자들이 먼저 쓰게 하면 된다.” →이 땅에 태어나서 / 솔

그는 이런 식의 굵은 구상들을 우선 먼저 내놓았다. 그리고 우리 기업인들이 거래하는 각국 기업인들의 도움을 얻어 그 나라들의 IOC 위원과의 접촉을 모색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안기부장한테 우리나라 기업인들 동원을 약속시켰다. 정주영은 우리 기업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현지에 와서 협조하고 활동하면서 정성을 기울이기만 하면 82표 중에서 유치에 절대 필요한 과반수 득표는 반드시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확신을 그냥 가슴에만 묻어두었다. 그리고 모두에게는 정말 서너 표만 나오는 결과가 되면 나라와 우리 경제인들이 합동으로 웃음거리가 되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체면 유지는 될 만큼의 표는 얻도록 노력하자고 했다.
당시 정주영은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 경제인들 단체장 중에서 책임감 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 바덴바덴으로 향했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의리를 지키며 살고싶다.
술은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마셔라!
내가 그자리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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