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부를 크게 갖고 매진한다
이채윤 CTN/교육타임즈 논설위원
가금현 기자입력 : 2025. 09. 22(월) 14:38

교육타임즈 93호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CTN]이상이란 별과 같아 아무도 거기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바다의 수부들처럼 우리는 그걸 보고 항해 코스를 그린다. - 칼 슈츠
남다른 포부와 실천방식
지난 40년 간 한국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 이끌어 왔다.
서구에서 근 300년에 걸쳐서 이룩한 산업화를 우리 사회는 단 40 여년 만에 따라 잡았다. 그동안 '성실'과 '근면'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정주영은 '성실'과 '근면'에서는 남에게 뒤지기를 서러워하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커다란 포부가 있었다.
그저 성실하기만 한 사람에게는 절대 기회가 오지 않는 법이다. 정주영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서 미래를 찾았고 남과 다른 방식으로 실천했다.
정주영은 청년 시철 처음 세운 사업체가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였기에 꼭 자신의 손으로 자동차틀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67년 세운 것이 ‘현대자동차'였다. 초기에는 외국 기술로 포드자동차의 '코티나'라는 자동차를 첫 조립 · 생산했지만 성능도 뒤떨어지고 판매도 부진하여 실패했다. 당시 외국 언론과 기업인들은 이렇게 현대를 비꼬았다.
“현대가 자동차 고유 모델을 만들어내고 수출한다는 것은 잠꼬대와 같은 일이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 울산에 국산 종합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고, 1976년 1월 우리나라의 고유 모델 1호 '포니(PONY)'를 만들어낸 것이 우리나라를 아시아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 모델을 가진 자동차 생산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최초로 고유 브랜드에 성공하고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시장에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끌어내었다. 미래 자동차에 대한 정주영의 애정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자동차는 그 나라 산업기술의 척도이며 달리는 국기이며, 자동차가 생산되는 나라는 무엇이든 완벽히 생산할 수 있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는 자동차가 국산화되면 우리나라의 산업이 발전하고 그것이 곧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동차에 막대한 투자와 노력을 쏟아 부었다. 정몽구는 이렇듯 아버지 정주영처럼 목표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믿는다. 바로 그런 사람이야말로 일을 통해 성공을 이룬 인생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주영은 그는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강한 나라’를 만드는 산업인 자동차, 중공업, 전자 등 국가기간산업 분야에 과감히 진출,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정주영은 중동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대조선소 신화, 포니ㆍ엑셀 신화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나라를 신흥공업국의 대열에 올려놓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주역으로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업가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가 보여준 활약상은 모든 기업가들이 체험하고 싶어 하는 자기실현의 기업가정신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정주영은 주로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추진력’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중동 주베일 항만시설 공사에 쓰일 철골구조물을 보험에 들지 않고 운송한 일을 “운은 좋았지만 너무 무모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현대측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렇지 않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음은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증언이다.
“모든 일을 결과로만 판단하니까 무모하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치밀한 준비와 분석이 깔려있지 않은 무모함은 한두 번 성공할 뿐 수십 년간 성공하지 못합니다. 철골 파이프는 아무리 무거워도 바다에 뜨게 마련입니다. 가다가 배가 부서져도 파이프는 건질 수 있다는 말이죠. 태풍이 극심한 필리핀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도 해류에 따라 대만 앞바다에 파이프가 떠오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막대한 보험금을 아낄 수 있었던 겁니다.”
비웃을 테면 비웃어라
모두 돈키호테 같은 발상이라고 고개를 내젖던 ‘기자재 대양수송작전’의 내용은 이렇다.
주베일 항만공사를 따낸 정주영은 애초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대양 수송 작전 계획을 발표했다.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해서 필리핀 해양을 거쳐 인도양을 지나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운반하자는 구상이었다. 그 지역은 세계 최대 태풍권이었고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 2천km로 경부고속도로를 15번 왕복하는 거리였다.
정주영이 그러한 계획을 발표하자 모두 그 무모함에 기가 질린 얼굴들이었다. 아무리 정주영이라도 그 일은 해내지 못할 것이란 표정들이었다. 자켓은 철 구조물 하나가 가로 18m, 세로 20m에 높이 36m, 무게가 5백50톤이나 되었다. 게다가 제작비는 당시 개당 5억 원짜리로 웬만한 10층 빌딩 규모였다. 계산적으로 이런 자켓이 89개가 필요하고 바지선으로 전부 19항차(航次)를 해야 하는 대역사였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정주영은 결단을 내렸다. 시간이 곧 돈인데 시간이 없었다. 무엇인가 한 번 결정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실천하고 마는 정주영의 스타일을 아는 참모들은 벌레 씹은 얼굴을 하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모험적인 사업이니까 보험을 들자고 제안했다. 정주영은 대뜸 이렇게 소리쳤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바지선이 바다에 빠지면 보험 회사가 건져주는 것도 아니고, 조사니 뭐니 시간만 끌면서 제때 나오지도 않을 보험 같은 건 들 필요가 없어.”
정주영은 보험 권유를 일축하고 대신 태풍으로 사고가 나도 철구조물이 바다 위에 떠 있도록 하는 공법을 구상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태풍 지대인 필립핀 해양과 몬순지대의 인도양의 험한 파도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작업을 명령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그 작업은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주영은 그 결고랄 보고 대만족을 표시했고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오일 쇼크로 일거리가 없어 침체되어 있던 울산조선소는 주베일 산업항에 들어갈 기자재를 만들어내느라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1976년 7월 울산조선소는 1천6백 톤급 해상 크레인을 가져다 자켓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울산조선소는 주야작업으로 1만 마력의 터그보트 3척, 대형 1만 5천8백 톤급 바지선 3척, 5천 톤급 바지선 3척을 만들어 냈다. 그때부터 수송기간이 35일 걸리는 운송작업이 시작되었고 19항차를 완벽하게 진행했다. 그 사이에 단지 2번의 가벼운 사고가 있었을 뿐이었다.
첫 번째 사고는 말라카 해협 싱가포르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1호선 바지선이 대만 국적 상선과 충돌했는데 자켓 하나의 파이프가 구부러진 사고였다. 두 번째 사고는 대만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소형 바지선 한 척을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대만 해안에서 되찾아온 사건이었다.
현대의 무모한 대 운송작업을 비웃던 세계의 기업인들이 놀라서 혀를 내둘렀다. 현대는 울산에서 제작한 빔을 바지선으로 실어다가 사우디 현장에 미리 설치해놓았던 자켓 89개 사이사이에 단 5cm 이내의 오차로 완벽하게 끼워 넣는데 성공함으로서 다시 한 번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남다른 포부와 실천방식
지난 40년 간 한국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 이끌어 왔다.
서구에서 근 300년에 걸쳐서 이룩한 산업화를 우리 사회는 단 40 여년 만에 따라 잡았다. 그동안 '성실'과 '근면'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정주영은 '성실'과 '근면'에서는 남에게 뒤지기를 서러워하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커다란 포부가 있었다.
그저 성실하기만 한 사람에게는 절대 기회가 오지 않는 법이다. 정주영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서 미래를 찾았고 남과 다른 방식으로 실천했다.
정주영은 청년 시철 처음 세운 사업체가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였기에 꼭 자신의 손으로 자동차틀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67년 세운 것이 ‘현대자동차'였다. 초기에는 외국 기술로 포드자동차의 '코티나'라는 자동차를 첫 조립 · 생산했지만 성능도 뒤떨어지고 판매도 부진하여 실패했다. 당시 외국 언론과 기업인들은 이렇게 현대를 비꼬았다.
“현대가 자동차 고유 모델을 만들어내고 수출한다는 것은 잠꼬대와 같은 일이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 울산에 국산 종합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고, 1976년 1월 우리나라의 고유 모델 1호 '포니(PONY)'를 만들어낸 것이 우리나라를 아시아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 모델을 가진 자동차 생산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최초로 고유 브랜드에 성공하고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시장에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끌어내었다. 미래 자동차에 대한 정주영의 애정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자동차는 그 나라 산업기술의 척도이며 달리는 국기이며, 자동차가 생산되는 나라는 무엇이든 완벽히 생산할 수 있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는 자동차가 국산화되면 우리나라의 산업이 발전하고 그것이 곧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동차에 막대한 투자와 노력을 쏟아 부었다. 정몽구는 이렇듯 아버지 정주영처럼 목표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믿는다. 바로 그런 사람이야말로 일을 통해 성공을 이룬 인생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주영은 그는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강한 나라’를 만드는 산업인 자동차, 중공업, 전자 등 국가기간산업 분야에 과감히 진출,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정주영은 중동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대조선소 신화, 포니ㆍ엑셀 신화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나라를 신흥공업국의 대열에 올려놓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주역으로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업가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가 보여준 활약상은 모든 기업가들이 체험하고 싶어 하는 자기실현의 기업가정신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정주영은 주로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추진력’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중동 주베일 항만시설 공사에 쓰일 철골구조물을 보험에 들지 않고 운송한 일을 “운은 좋았지만 너무 무모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현대측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렇지 않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음은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증언이다.
“모든 일을 결과로만 판단하니까 무모하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치밀한 준비와 분석이 깔려있지 않은 무모함은 한두 번 성공할 뿐 수십 년간 성공하지 못합니다. 철골 파이프는 아무리 무거워도 바다에 뜨게 마련입니다. 가다가 배가 부서져도 파이프는 건질 수 있다는 말이죠. 태풍이 극심한 필리핀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도 해류에 따라 대만 앞바다에 파이프가 떠오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막대한 보험금을 아낄 수 있었던 겁니다.”
비웃을 테면 비웃어라
모두 돈키호테 같은 발상이라고 고개를 내젖던 ‘기자재 대양수송작전’의 내용은 이렇다.
주베일 항만공사를 따낸 정주영은 애초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대양 수송 작전 계획을 발표했다.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해서 필리핀 해양을 거쳐 인도양을 지나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운반하자는 구상이었다. 그 지역은 세계 최대 태풍권이었고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 2천km로 경부고속도로를 15번 왕복하는 거리였다.
정주영이 그러한 계획을 발표하자 모두 그 무모함에 기가 질린 얼굴들이었다. 아무리 정주영이라도 그 일은 해내지 못할 것이란 표정들이었다. 자켓은 철 구조물 하나가 가로 18m, 세로 20m에 높이 36m, 무게가 5백50톤이나 되었다. 게다가 제작비는 당시 개당 5억 원짜리로 웬만한 10층 빌딩 규모였다. 계산적으로 이런 자켓이 89개가 필요하고 바지선으로 전부 19항차(航次)를 해야 하는 대역사였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정주영은 결단을 내렸다. 시간이 곧 돈인데 시간이 없었다. 무엇인가 한 번 결정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실천하고 마는 정주영의 스타일을 아는 참모들은 벌레 씹은 얼굴을 하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모험적인 사업이니까 보험을 들자고 제안했다. 정주영은 대뜸 이렇게 소리쳤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바지선이 바다에 빠지면 보험 회사가 건져주는 것도 아니고, 조사니 뭐니 시간만 끌면서 제때 나오지도 않을 보험 같은 건 들 필요가 없어.”
정주영은 보험 권유를 일축하고 대신 태풍으로 사고가 나도 철구조물이 바다 위에 떠 있도록 하는 공법을 구상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태풍 지대인 필립핀 해양과 몬순지대의 인도양의 험한 파도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작업을 명령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그 작업은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주영은 그 결고랄 보고 대만족을 표시했고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오일 쇼크로 일거리가 없어 침체되어 있던 울산조선소는 주베일 산업항에 들어갈 기자재를 만들어내느라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1976년 7월 울산조선소는 1천6백 톤급 해상 크레인을 가져다 자켓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울산조선소는 주야작업으로 1만 마력의 터그보트 3척, 대형 1만 5천8백 톤급 바지선 3척, 5천 톤급 바지선 3척을 만들어 냈다. 그때부터 수송기간이 35일 걸리는 운송작업이 시작되었고 19항차를 완벽하게 진행했다. 그 사이에 단지 2번의 가벼운 사고가 있었을 뿐이었다.
첫 번째 사고는 말라카 해협 싱가포르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1호선 바지선이 대만 국적 상선과 충돌했는데 자켓 하나의 파이프가 구부러진 사고였다. 두 번째 사고는 대만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소형 바지선 한 척을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대만 해안에서 되찾아온 사건이었다.
현대의 무모한 대 운송작업을 비웃던 세계의 기업인들이 놀라서 혀를 내둘렀다. 현대는 울산에서 제작한 빔을 바지선으로 실어다가 사우디 현장에 미리 설치해놓았던 자켓 89개 사이사이에 단 5cm 이내의 오차로 완벽하게 끼워 넣는데 성공함으로서 다시 한 번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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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의리를 지키며 살고싶다.
술은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마셔라!
내가 그자리에 있다고
CTN·충청탑뉴스·CTN방송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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