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막강한 힘
이채윤 논설위원
가금현 기자입력 : 2025. 11. 27(목) 17:06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교육타임즈 94호 기사 스크랩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CTN]주베일 산업항 공사에서 시공 능력을 과시한 현대는 라스알가르 주택항 공사, 알코바, 첫다 지역의 대단위 주택 공사,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 공사, 두바이 발전소, 바스라 하수처리 공사 등등의 대형 공사를 수주했다. 현대가 이런 대규모 공사를 연속적으로 수주하게 된 것은 울산조선소의 제작 능력이 받침이 되어 싼 응찰 가격을 제시할 수 있는 경쟁력 때문이었다.
1975년 중동 진출 후 1979년까지 '현대'는 대략 51억 6천4백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같은 기간 '현대'의 총매출 이익 누계 가운데 60%가 해외 건설 공사의 이익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정주영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현대' 가 이만큼 성장한 것을 두고 혹자는 6 · 25와 함께 우리가 미군 공사를 통해서 익힌 토목 기술 덕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우리 '현대’의 출발은 토목 분야였지만, 나는 1960년대에 이미 플랜트 분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토목으로 1등을 할 수 있으면 플랜트도 1등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들만 있으면, 기회만 있으면, 모든 분야에 머리를 들이밀었던 '현대'는 본격적인 플랜트 공사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1959년도에 벌써 호남비료 나주 공장에 자가 발전소를 설치했다.
5 · 16혁명이 나고 경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우리는 플랜트 사업에 적극 참여해서 감천, 삼척, 영월, 군산, 연천발전소의 공사를 했고 원자력 공사까지 했다.
게다가 소양강댐, 충청댐 같은 다목적댐을 만들면서 수력 발전소까지 건설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발전소에 참여한 셈이었다.
그것이 '현대건설'이 다른 어떤 건설 회사보다 플랜트 분야가 강화된 토대였다.
그 과정에서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그 피나는 고생으로 축적한 기술을 갖고 우리는 해외 건설 시장에 진출했고, 그 위에 시의 적절하게 건설했던 조선소가 상부상조함으로써 오늘의 '현대건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중공업을 빼고 '현대'의 해외 건설을 말할 수 없고, 해외 건설을 빼고 '현대중공업'을 말할 수 없다. 만약 1970년대 초에 우리가 중공업 건설을 하지 않았더라면 1970년대 중반 중동 건설 시장에 진출한 '현대건설'의 그 대단한 실적은 불가능했다.
또 반면에 그때 만약 우리가 중동 건설 시장에 뛰어들어 오일 쇼크로 좌초될 위기에 처했던 중공업에 자생력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더라면, 중공업의 오늘날 성장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강행했던 조선소 건설로 '현대'를 중공업화한 것은 시기적으로 더할 수 없이 적중했다는 결론이다.
1975년 10월 '현대건설'이 바레인의 아람 수리조선소를 수주했을 때만 해도 현지 언론은 우리를 중위권 건설회사로 소개했었는데, 그 4년 후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사우디, 바레인 코스웨이 공사입찰 자격 심사위원회는 5대 적격업체의 하나로 우러를 꼽을 만큼 '현대'는 급성장했다.
이것은 플랜트를 비롯해 각종 건설기자재의 제작과 수송 능력을 갖춘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의 후방 기지로서 국내에서 탄탄히 버티고 있었던 덕으로 이룬 급성장이었고, 중공업과 건설의 이 특이한 유기적인 관계로 우리의 해외 건설 외화 가득률이 다른 건설업체에 비해 거의 2배에 달했다.
물론 '현대'의 성장에서 호된 훈련으로 키워진 알짜배기 우수한 인력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1958년도부터 우리나라 어느 건설업체보다도 빠르게 공채로 사원을 뽑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그다지 많이는 안 뽑았지만 실력 있는 인재들이 꽤 많이 들어와서 현대'의 막강한 힘, 그 자체가 되어주었다.
<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 솔 1998>
1975년 중동 진출 후 1979년까지 '현대'는 대략 51억 6천4백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같은 기간 '현대'의 총매출 이익 누계 가운데 60%가 해외 건설 공사의 이익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정주영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현대' 가 이만큼 성장한 것을 두고 혹자는 6 · 25와 함께 우리가 미군 공사를 통해서 익힌 토목 기술 덕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우리 '현대’의 출발은 토목 분야였지만, 나는 1960년대에 이미 플랜트 분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토목으로 1등을 할 수 있으면 플랜트도 1등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들만 있으면, 기회만 있으면, 모든 분야에 머리를 들이밀었던 '현대'는 본격적인 플랜트 공사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1959년도에 벌써 호남비료 나주 공장에 자가 발전소를 설치했다.
5 · 16혁명이 나고 경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우리는 플랜트 사업에 적극 참여해서 감천, 삼척, 영월, 군산, 연천발전소의 공사를 했고 원자력 공사까지 했다.
게다가 소양강댐, 충청댐 같은 다목적댐을 만들면서 수력 발전소까지 건설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발전소에 참여한 셈이었다.
그것이 '현대건설'이 다른 어떤 건설 회사보다 플랜트 분야가 강화된 토대였다.
그 과정에서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그 피나는 고생으로 축적한 기술을 갖고 우리는 해외 건설 시장에 진출했고, 그 위에 시의 적절하게 건설했던 조선소가 상부상조함으로써 오늘의 '현대건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중공업을 빼고 '현대'의 해외 건설을 말할 수 없고, 해외 건설을 빼고 '현대중공업'을 말할 수 없다. 만약 1970년대 초에 우리가 중공업 건설을 하지 않았더라면 1970년대 중반 중동 건설 시장에 진출한 '현대건설'의 그 대단한 실적은 불가능했다.
또 반면에 그때 만약 우리가 중동 건설 시장에 뛰어들어 오일 쇼크로 좌초될 위기에 처했던 중공업에 자생력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더라면, 중공업의 오늘날 성장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강행했던 조선소 건설로 '현대'를 중공업화한 것은 시기적으로 더할 수 없이 적중했다는 결론이다.
1975년 10월 '현대건설'이 바레인의 아람 수리조선소를 수주했을 때만 해도 현지 언론은 우리를 중위권 건설회사로 소개했었는데, 그 4년 후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사우디, 바레인 코스웨이 공사입찰 자격 심사위원회는 5대 적격업체의 하나로 우러를 꼽을 만큼 '현대'는 급성장했다.
이것은 플랜트를 비롯해 각종 건설기자재의 제작과 수송 능력을 갖춘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의 후방 기지로서 국내에서 탄탄히 버티고 있었던 덕으로 이룬 급성장이었고, 중공업과 건설의 이 특이한 유기적인 관계로 우리의 해외 건설 외화 가득률이 다른 건설업체에 비해 거의 2배에 달했다.
물론 '현대'의 성장에서 호된 훈련으로 키워진 알짜배기 우수한 인력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1958년도부터 우리나라 어느 건설업체보다도 빠르게 공채로 사원을 뽑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그다지 많이는 안 뽑았지만 실력 있는 인재들이 꽤 많이 들어와서 현대'의 막강한 힘, 그 자체가 되어주었다.
<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 솔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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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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