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사고는 성공을 선사한다
-이채윤 CTN/교육타임즈 논설위원
가금현 기자입력 : 2024. 12. 09(월) 15:12

이채운 CTN/교육타임즈 논설위원
[리채윤의 실천하라, 정주영처럼/CTN]“일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올바른 생각을 가질 수 없다. 게으름은 비뚤어진 마음을 갖게 만든다. 긍정적인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고는 병균과 같다. ”
- 헨리 포드
모든 경우로부터 배우는 사람
‘마음의 건강학’을 쓴 사사키 모리오라가 어떤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즐겁게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게 하는 사람과의 수명의 차이는 10년 이상이나 난다. 비단 수명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나 물질적 소유 등 모든 면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절대적이라 할 만큼 즐거운 기분을 항시 소유해야 한다. 성공하고 부를 누리며 장수하는 사람일수록 유머가 풍부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이기 때문에 즐거워진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소 억지스런 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란 말이 최근에 과학적으로도 맞는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일을 즐겁게 한다는 것은 몸에 엔돌핀의 증가를 만들어내고 신진대사가 원활해짐에 따라 그 사람은 활력이 넘치게 된다. 활력은 그 사람의 얼굴빛을 밝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때문에, 설령 그가 하는 일이 어려움을 겪거나 실패를 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긍정의 힘은 그만큼 크다.
긍정의 힘을 알고 활용하는 사람은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란 '모든 경우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모든 경우'란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을 같이 일컫는 말이다.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에서도 긍정의 힘을 발견해 내는 사람이야말로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이다.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은 슬기로운 생각이 넘쳐나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므로 누구로부터도 환영받는다. 이러한 자아실현의 수단은 자신의 재능을 펼쳐나갈 수 있는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일의 만족스러운 성취가 자아실현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정주영은 진정 모든 경우로부터 배우는 사람이었고 자아실현을 이룬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했다.
부정을 긍정의 힘으로
일제의 폭거로 쌀가게를 접고 쌀가게의 단골손님이었던 이을학의 제안으로 자동차 수리공장아도서비스를 시작할 때의 일이다. 정주영은 이을학의 제안을 듣고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으나, 그 공장을 인수하는 데는 3천 5백 원이라는 거금이 들었다. 그에게는 쌀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천 원의 돈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생각에 잠겼다. 3천 5백 원이라는 거금을 어떻게 마련한다는 말인가.
그때 정주영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삼창정미소의 오윤근이었다.
정주영은 곧바로 오윤근을 찾아갔다. 그는 정주영이 쌀가게를 할 때 쌀을 대주던 사람인데, 사채업도 하는 사람이었다. 정주영의 설명을 들은 오윤근은 선뜻 3천 원이라는 거금을 신용만으로 빌려주었다. 쌀가게를 하면서 쌓았던 정주영의 신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정주영은 그 3천 원에 동업자가 된 두 사람인 이을학의 3백 원, 김명현의 2백 원, 그리고 고향 친구 오인보에게서 빌린 5백 원, 합해서 총 5천 원을 가지고 ‘아도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공장은 문을 연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불이나 잿더미가 돼버렸다.
공장인수 자금도 빚이었는데, 외상으로 들여놓은 부속품 값, 고객의 자동차 값이 합쳐져 모두 빚더미로 불어났다. 정주영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다시 오윤근을 찾아갔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꿇어앉아 사정했다.
“뜻하지 않은 화재를 만나 영감님 돈 3천 원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한 번만 더 도와주셔서 영감님 빚을 갚게 해주십시오.”
오윤근은 정주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준 적이 없다네. 신용만 보고 돈을 빌려주었어도 떼인 적이 없지. 자네의 신용만을 보고 빌려주겠네. 내 평생에 사람 잘못 봐서 돈 떼었다는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게.”
정주영은 그렇게 해서 다시 3천 5백 원의 돈을 더 빌렸다. 그는 신설동 빈터를 얻어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재개했다. 무허가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남들보다 빨리 고치고 수리비를 비싸게 받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신설동 공장은 무허가라서 다른 경쟁업체들의 질시와 경찰의 단속이 문제였다. 정주영은 공장부지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갔다. 담당 경찰서인 동대문경찰서에서 도무지 허가를 내줄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담당인 일본인 보안계장은 조선인이 그런 사업을 한다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 하는 자였다. 정주영이 수시로 찾아가서 귀찮게 하자 그는 정주영에게 구속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집념의 사나이였던 정주영은 쉽게 물러서질 않았다.
그는 아예 매일 아침 보안계장의 집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보안계장은 그가 한 달 내내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부탁하자 그 지성에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는 나중에는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방법을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아도서비스의 성공 전략
당시 서울에는 일진공작소, 경성서비스, 경성공업사 등 세 곳의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었다. 이 수리공장들은 대부분 긴 시간을 잡고 수리했는데, 정주영의 전략은 남달랐다.
당시 서울에 있던 승용차라고는 귀족들이나 조선총독부 국장들 소유의 10여 대, 도지사 1대, 경무부장과 일본군 사단장급, 그리고 조선은행 등 큰 은행과 큰 일본회사 몇 군데서 가지고 있는 정도였다. 그밖에 택시가 좀 있었지만 그것은 불과 몇 대 되지 않았다.
차가 귀한 시절이다보니 고장 났다 하면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기 일쑤였으므로 가급적 빨리, 제대로 고쳐주는 것이 최고의 서비스였다. 다른 자동차 공업사들이 열흘 걸리는 수리를 아도서비스는 단 사흘 만에 해주고, 이틀 걸리는 수리는 단 하루 만에 해주며 고객들에게 신용을 쌓았다.
<당시 자동차는 고관대작이나 가지고 있었지. 한국 사람으로는 육영수 씨 아버지하고 저 공주의 ‘민나도로보데스’ 하는 김갑순 씨하고, 몇 명뿐이었어요. 이렇게 차가 귀하니까 누가 빨리 고쳐주느냐로 승부하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었는데, 하여튼 자동차가 고장나면 꼼짝을 못 하니까 부인들까지 와서 빨리 고쳐달라고 야단이에요. 그래 우리는 다른 데서 스무 날 걸리는 걸 밤새워 닷새에 고쳐줬죠. 빨리만 고쳐주면 돈은 청구하는 대로 나왔으니까. 난 ABC를 배우질 않아서 영어를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 알아듣는 기초가 어디서 나왔느냐? 그때 배운 자동차 부속품 덕이지. 발음만 일본식이지 다 영어예요. 봐요, 헤드라이트, 룸 라이트, 시드, 쪼인트, 후론또, 휀다, 기아 ‥· 전부 영어잖아. 그럼 왜 이걸 그렇게 외웠느냐? 아, 일본 사람들 속여먹어야 하잖아. 공장에 들어오는 자동차를 전부 뜯어 놓고서 헌 부속을 깨끗이 닦아서 다시 끼우고 '새 부속 갈았다'고 하는 거야. 그때 돈 많이 벌었지. (오효진 ‘슈퍼스타 정주영’, 월간조선, 1985년 9월)>
그 후 아도서비스는 날로 번창해 갔다. 정주영은 신설동 공장 가까운 곳에 집을 사서 이사하는 한편 시골에 있는 둘째 동생 순영과 그 아래누이동생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정주영은 바로 아래 동생인 인영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놓고 있었다. 청산학원 영문과를 나온 인영은 훗날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현대그룹을 만들어내는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공장은 밤을 새워 일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스스로 파국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시국은 또 한 차례 정주영을 폐업의 수렁으로 쓸어 넣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3년 초, ‘기업정비령’을 공포하고 정주영의 서비스 공장을 빼앗아버렸다. 그 무렵 일제는 민가에서 놋그릇, 놋수저까지도 걷어 들이며 힘겨운 전쟁을 수행하던 때였다.
광석 운반업
그런데 문제는 회사를 문 닫은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정주영 본인과 같이 일하던 두 동생이 모두 징용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정주영은 자동차수리공장 할 때 알았던 한 광산의 사장에게 부탁해서 황해도 수안(遂安)에 있는 홀동 광산에서 광석 운반업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광산이 일종의 방위산업체였으므로 광산 관련 업무 종사자는 징용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정주영은 이미 가난뱅이가 아니었다. 그는 새 트럭 20여 대와 헌 트럭 10여 대를 사고도 기만 원의 돈이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가 트럭을 산 것은 광석 운반의 하청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주영은 그 해 5월, 보증금 3만 원을 걸고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홀동금광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실어내는 하청 운반계약을 체결했다. 홀동금광에서 평양 선교리까지 운송 거리는 장장 1백 3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다. 트럭이 30여 대나 돼서 벌이는 쏠쏠하게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 측과의 마찰이었다.
“왜 금덩이나 다름없는 광석을 싣고 가다가 길바닥에 흘리느냐, 왜 많이 실었느냐, 왜 적게 싫었느냐”는 등...
회사 측 잔소리를 들을 때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그만두면 징용에 끌려 나갈 염려도 있고 해서 그는 꾹꾹 참고 지냈다.
정주영은 광복 직전에 새로 부임해 온 소장이 유별나게 아니꼽게 굴자 징용의 위험도 무릅쓰고 미련 없이 광산을 떠났는데, 그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되었다.
그가 광산을 떠난 지 불과 3개월 뒤,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했다. 만일 그때까지 광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그들은 창씨개명을 했던 탓에 다른 일본인들과 함께 소련군에게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갔을 뻔했다.
이러한 결과는 나중에 생각해보니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가려던 정주영의 긍정의 힘인 셈이다.
- 헨리 포드
모든 경우로부터 배우는 사람
‘마음의 건강학’을 쓴 사사키 모리오라가 어떤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즐겁게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게 하는 사람과의 수명의 차이는 10년 이상이나 난다. 비단 수명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나 물질적 소유 등 모든 면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절대적이라 할 만큼 즐거운 기분을 항시 소유해야 한다. 성공하고 부를 누리며 장수하는 사람일수록 유머가 풍부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이기 때문에 즐거워진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소 억지스런 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란 말이 최근에 과학적으로도 맞는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일을 즐겁게 한다는 것은 몸에 엔돌핀의 증가를 만들어내고 신진대사가 원활해짐에 따라 그 사람은 활력이 넘치게 된다. 활력은 그 사람의 얼굴빛을 밝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때문에, 설령 그가 하는 일이 어려움을 겪거나 실패를 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긍정의 힘은 그만큼 크다.
긍정의 힘을 알고 활용하는 사람은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란 '모든 경우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모든 경우'란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을 같이 일컫는 말이다.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에서도 긍정의 힘을 발견해 내는 사람이야말로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이다.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은 슬기로운 생각이 넘쳐나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므로 누구로부터도 환영받는다. 이러한 자아실현의 수단은 자신의 재능을 펼쳐나갈 수 있는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일의 만족스러운 성취가 자아실현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정주영은 진정 모든 경우로부터 배우는 사람이었고 자아실현을 이룬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했다.
부정을 긍정의 힘으로
일제의 폭거로 쌀가게를 접고 쌀가게의 단골손님이었던 이을학의 제안으로 자동차 수리공장아도서비스를 시작할 때의 일이다. 정주영은 이을학의 제안을 듣고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으나, 그 공장을 인수하는 데는 3천 5백 원이라는 거금이 들었다. 그에게는 쌀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천 원의 돈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생각에 잠겼다. 3천 5백 원이라는 거금을 어떻게 마련한다는 말인가.
그때 정주영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삼창정미소의 오윤근이었다.
정주영은 곧바로 오윤근을 찾아갔다. 그는 정주영이 쌀가게를 할 때 쌀을 대주던 사람인데, 사채업도 하는 사람이었다. 정주영의 설명을 들은 오윤근은 선뜻 3천 원이라는 거금을 신용만으로 빌려주었다. 쌀가게를 하면서 쌓았던 정주영의 신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정주영은 그 3천 원에 동업자가 된 두 사람인 이을학의 3백 원, 김명현의 2백 원, 그리고 고향 친구 오인보에게서 빌린 5백 원, 합해서 총 5천 원을 가지고 ‘아도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공장은 문을 연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불이나 잿더미가 돼버렸다.
공장인수 자금도 빚이었는데, 외상으로 들여놓은 부속품 값, 고객의 자동차 값이 합쳐져 모두 빚더미로 불어났다. 정주영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다시 오윤근을 찾아갔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꿇어앉아 사정했다.
“뜻하지 않은 화재를 만나 영감님 돈 3천 원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한 번만 더 도와주셔서 영감님 빚을 갚게 해주십시오.”
오윤근은 정주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준 적이 없다네. 신용만 보고 돈을 빌려주었어도 떼인 적이 없지. 자네의 신용만을 보고 빌려주겠네. 내 평생에 사람 잘못 봐서 돈 떼었다는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게.”
정주영은 그렇게 해서 다시 3천 5백 원의 돈을 더 빌렸다. 그는 신설동 빈터를 얻어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재개했다. 무허가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남들보다 빨리 고치고 수리비를 비싸게 받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신설동 공장은 무허가라서 다른 경쟁업체들의 질시와 경찰의 단속이 문제였다. 정주영은 공장부지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갔다. 담당 경찰서인 동대문경찰서에서 도무지 허가를 내줄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담당인 일본인 보안계장은 조선인이 그런 사업을 한다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 하는 자였다. 정주영이 수시로 찾아가서 귀찮게 하자 그는 정주영에게 구속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집념의 사나이였던 정주영은 쉽게 물러서질 않았다.
그는 아예 매일 아침 보안계장의 집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보안계장은 그가 한 달 내내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부탁하자 그 지성에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는 나중에는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방법을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아도서비스의 성공 전략
당시 서울에는 일진공작소, 경성서비스, 경성공업사 등 세 곳의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었다. 이 수리공장들은 대부분 긴 시간을 잡고 수리했는데, 정주영의 전략은 남달랐다.
당시 서울에 있던 승용차라고는 귀족들이나 조선총독부 국장들 소유의 10여 대, 도지사 1대, 경무부장과 일본군 사단장급, 그리고 조선은행 등 큰 은행과 큰 일본회사 몇 군데서 가지고 있는 정도였다. 그밖에 택시가 좀 있었지만 그것은 불과 몇 대 되지 않았다.
차가 귀한 시절이다보니 고장 났다 하면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기 일쑤였으므로 가급적 빨리, 제대로 고쳐주는 것이 최고의 서비스였다. 다른 자동차 공업사들이 열흘 걸리는 수리를 아도서비스는 단 사흘 만에 해주고, 이틀 걸리는 수리는 단 하루 만에 해주며 고객들에게 신용을 쌓았다.
<당시 자동차는 고관대작이나 가지고 있었지. 한국 사람으로는 육영수 씨 아버지하고 저 공주의 ‘민나도로보데스’ 하는 김갑순 씨하고, 몇 명뿐이었어요. 이렇게 차가 귀하니까 누가 빨리 고쳐주느냐로 승부하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었는데, 하여튼 자동차가 고장나면 꼼짝을 못 하니까 부인들까지 와서 빨리 고쳐달라고 야단이에요. 그래 우리는 다른 데서 스무 날 걸리는 걸 밤새워 닷새에 고쳐줬죠. 빨리만 고쳐주면 돈은 청구하는 대로 나왔으니까. 난 ABC를 배우질 않아서 영어를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 알아듣는 기초가 어디서 나왔느냐? 그때 배운 자동차 부속품 덕이지. 발음만 일본식이지 다 영어예요. 봐요, 헤드라이트, 룸 라이트, 시드, 쪼인트, 후론또, 휀다, 기아 ‥· 전부 영어잖아. 그럼 왜 이걸 그렇게 외웠느냐? 아, 일본 사람들 속여먹어야 하잖아. 공장에 들어오는 자동차를 전부 뜯어 놓고서 헌 부속을 깨끗이 닦아서 다시 끼우고 '새 부속 갈았다'고 하는 거야. 그때 돈 많이 벌었지. (오효진 ‘슈퍼스타 정주영’, 월간조선, 1985년 9월)>
그 후 아도서비스는 날로 번창해 갔다. 정주영은 신설동 공장 가까운 곳에 집을 사서 이사하는 한편 시골에 있는 둘째 동생 순영과 그 아래누이동생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정주영은 바로 아래 동생인 인영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놓고 있었다. 청산학원 영문과를 나온 인영은 훗날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현대그룹을 만들어내는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공장은 밤을 새워 일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스스로 파국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시국은 또 한 차례 정주영을 폐업의 수렁으로 쓸어 넣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3년 초, ‘기업정비령’을 공포하고 정주영의 서비스 공장을 빼앗아버렸다. 그 무렵 일제는 민가에서 놋그릇, 놋수저까지도 걷어 들이며 힘겨운 전쟁을 수행하던 때였다.
광석 운반업
그런데 문제는 회사를 문 닫은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정주영 본인과 같이 일하던 두 동생이 모두 징용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정주영은 자동차수리공장 할 때 알았던 한 광산의 사장에게 부탁해서 황해도 수안(遂安)에 있는 홀동 광산에서 광석 운반업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광산이 일종의 방위산업체였으므로 광산 관련 업무 종사자는 징용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정주영은 이미 가난뱅이가 아니었다. 그는 새 트럭 20여 대와 헌 트럭 10여 대를 사고도 기만 원의 돈이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가 트럭을 산 것은 광석 운반의 하청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주영은 그 해 5월, 보증금 3만 원을 걸고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홀동금광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실어내는 하청 운반계약을 체결했다. 홀동금광에서 평양 선교리까지 운송 거리는 장장 1백 3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다. 트럭이 30여 대나 돼서 벌이는 쏠쏠하게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 측과의 마찰이었다.
“왜 금덩이나 다름없는 광석을 싣고 가다가 길바닥에 흘리느냐, 왜 많이 실었느냐, 왜 적게 싫었느냐”는 등...
회사 측 잔소리를 들을 때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그만두면 징용에 끌려 나갈 염려도 있고 해서 그는 꾹꾹 참고 지냈다.
정주영은 광복 직전에 새로 부임해 온 소장이 유별나게 아니꼽게 굴자 징용의 위험도 무릅쓰고 미련 없이 광산을 떠났는데, 그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되었다.
그가 광산을 떠난 지 불과 3개월 뒤,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했다. 만일 그때까지 광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그들은 창씨개명을 했던 탓에 다른 일본인들과 함께 소련군에게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갔을 뻔했다.
이러한 결과는 나중에 생각해보니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가려던 정주영의 긍정의 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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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의리를 지키며 살고싶다.
술은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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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N·충청탑뉴스·CTN방송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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