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세이]그래서 선생님, 궁금한 거 있어요
김영희 CTN객원기자
김영희 객원기자입력 : 2026. 03. 23(월) 16:53

김영희 CTN객원기자
[CTN교육에세이]초등학교 3학년 손녀가 학교에서 돌아와 신이 나서 말했다.
"할머니, 오늘 선생님이 물어보셨어요. 궁금한 거 있냐고!"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6학년이 된 오빠는 고개를 저었다. "중학교 가면 질문 같은 거 안 해. 진도 나가기도 바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게 전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문득 예전 직장 생활이 떠올랐다. 회의 시간, 부장님이 "의견 있으면 말해보세요"라고 했지만 회의실은 조용했다. 다들 고개만 끄덕였다. 질문이 있어도, 다른 생각이 있어도 입을 다물었다. "괜히 튀면 찍힌다", "윗사람 말씀에 반박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 언제부터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렸을까?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학창시절,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질문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 "진도 나가는데 방해된다"는 분위기, "선생님 말씀을 의심하는 건가"라는 무언의 압박. 그렇게 질문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답을 외우고, 4지선다형에서 정답을 고르는 기계가 되어갔다.
세상이 바뀌었다. 챗GPT가 등장한 지 3년 만에 사용자 9억 명을 모았다. 인터넷이 같은 숫자를 모으는 데 13년이 걸렸으니, 7배나 빠른 속도다. 이제 누가 더 많이 아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AI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대신 누가 더 좋은 질문을 하느냐가 경쟁력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컴퓨터 앞에서 늘 주눅 들었던 시니어들에게 희망이 있다. 어느 날 70대 어르신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 나 컴맹이라 AI 못 쓰는 거 아니에요?" 그분께 물었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 말씀 이해 안 될 때 어떻게 물어보세요?" 그분은 자연스럽게 답했다. "40년 넘게 농사지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설명해달라고 하죠."
그 한 문장 안에 모든 게 들어있었다. 자신의 삶, 이해 수준, 필요한 것. 젊은 프로그래머가 기술은 잘 알아도 이런 맥락 있는 질문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온 질문이었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 시간에 "오늘 뭘 배웠니?"가 아니라 "오늘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고 한다. 질문이 배움의 시작이고, 사고의 확장이며,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우리는 정반대였다.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그렇게 질문은 불온한 것, 무례한 것이 되었다.
지금은 역설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AI가 모든 걸 대신 생각해주면서 사고할 기회마저 잃어가고 있다. 최근 대학에서 AI로 과제를 대신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도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답 고르기에만 급급했던 교육이 "왜 배우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조차 못 하게 만든 결과다. 운동을 대신해 주는 기계가 있다고 건강해지는 게 아니듯 AI가 생각을 대신하면 우리 뇌의 근육은 점점 약해진다.
더 걱정스러운 건 일자리다. 기업들은 주니어가 하던 일을 AI에게 맡기고 있다. 지금 신입을 안 뽑으면 10년 뒤엔 숙련된 인력이 사라진다. 미국에서는 이미 경기는 좋은데 일자리는 줄어드는 '고용 없는 성장'이 현실이 되었다. 답만 찾도록 훈련받은 세대가 일자리도 잃고 사고력도 빼앗기는 이중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다시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AI에게 "이거 요약해줘"라고 하는 것과 "60대 초보자가 이해할 수 있게 일상적인 비유로 설명해줘"라고 하는 건 천지 차이다. 전자는 기계를 부리는 것이고 후자는 사고의 동반자를 초대하는 것이다.
정부가 전국민 AI 교육을 시작한다니 반갑다. 하지만 프롬프트 작성법이나 툴 사용법만 가르쳐선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하는 문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질문이 환영받는 분위기를, 중고등학교에서 토론이 일상이 되는 교육을, 시니어들에게는 살아온 경험이 최고의 질문 자산임을 일깨워야 한다.
손녀에게 물어야 한다. "너희 반에서 질문 제일 많이 하는 친구 누구야?" "민지요! 선생님이 민지는 생각이 많대요." 아이의 대답에 희망이 보인다. 질문이 창피가 아니라 생각의 증거가 되는 교실. 그곳에서 진짜 AI 시대를 이끌 아이들이 자랄 것이다.
회의실에서 침묵했던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 이제 그 침묵을 깨뜨릴 때다. AI 강국이 되려면 최첨단 알고리즘보다 질문할 수 있는 용기와 그 질문을 환영하는 문화가 먼저다. 질문은 무례가 아니라 사유의 시작이다. 질문의 힘이야말로 AI 위에 서는 유일한 길이다.
"할머니, 오늘 선생님이 물어보셨어요. 궁금한 거 있냐고!"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6학년이 된 오빠는 고개를 저었다. "중학교 가면 질문 같은 거 안 해. 진도 나가기도 바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게 전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문득 예전 직장 생활이 떠올랐다. 회의 시간, 부장님이 "의견 있으면 말해보세요"라고 했지만 회의실은 조용했다. 다들 고개만 끄덕였다. 질문이 있어도, 다른 생각이 있어도 입을 다물었다. "괜히 튀면 찍힌다", "윗사람 말씀에 반박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 언제부터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렸을까?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학창시절,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질문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 "진도 나가는데 방해된다"는 분위기, "선생님 말씀을 의심하는 건가"라는 무언의 압박. 그렇게 질문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답을 외우고, 4지선다형에서 정답을 고르는 기계가 되어갔다.
세상이 바뀌었다. 챗GPT가 등장한 지 3년 만에 사용자 9억 명을 모았다. 인터넷이 같은 숫자를 모으는 데 13년이 걸렸으니, 7배나 빠른 속도다. 이제 누가 더 많이 아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AI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대신 누가 더 좋은 질문을 하느냐가 경쟁력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컴퓨터 앞에서 늘 주눅 들었던 시니어들에게 희망이 있다. 어느 날 70대 어르신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 나 컴맹이라 AI 못 쓰는 거 아니에요?" 그분께 물었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 말씀 이해 안 될 때 어떻게 물어보세요?" 그분은 자연스럽게 답했다. "40년 넘게 농사지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설명해달라고 하죠."
그 한 문장 안에 모든 게 들어있었다. 자신의 삶, 이해 수준, 필요한 것. 젊은 프로그래머가 기술은 잘 알아도 이런 맥락 있는 질문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온 질문이었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 시간에 "오늘 뭘 배웠니?"가 아니라 "오늘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고 한다. 질문이 배움의 시작이고, 사고의 확장이며,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우리는 정반대였다.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그렇게 질문은 불온한 것, 무례한 것이 되었다.
지금은 역설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AI가 모든 걸 대신 생각해주면서 사고할 기회마저 잃어가고 있다. 최근 대학에서 AI로 과제를 대신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도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답 고르기에만 급급했던 교육이 "왜 배우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조차 못 하게 만든 결과다. 운동을 대신해 주는 기계가 있다고 건강해지는 게 아니듯 AI가 생각을 대신하면 우리 뇌의 근육은 점점 약해진다.
더 걱정스러운 건 일자리다. 기업들은 주니어가 하던 일을 AI에게 맡기고 있다. 지금 신입을 안 뽑으면 10년 뒤엔 숙련된 인력이 사라진다. 미국에서는 이미 경기는 좋은데 일자리는 줄어드는 '고용 없는 성장'이 현실이 되었다. 답만 찾도록 훈련받은 세대가 일자리도 잃고 사고력도 빼앗기는 이중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다시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AI에게 "이거 요약해줘"라고 하는 것과 "60대 초보자가 이해할 수 있게 일상적인 비유로 설명해줘"라고 하는 건 천지 차이다. 전자는 기계를 부리는 것이고 후자는 사고의 동반자를 초대하는 것이다.
정부가 전국민 AI 교육을 시작한다니 반갑다. 하지만 프롬프트 작성법이나 툴 사용법만 가르쳐선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하는 문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질문이 환영받는 분위기를, 중고등학교에서 토론이 일상이 되는 교육을, 시니어들에게는 살아온 경험이 최고의 질문 자산임을 일깨워야 한다.
손녀에게 물어야 한다. "너희 반에서 질문 제일 많이 하는 친구 누구야?" "민지요! 선생님이 민지는 생각이 많대요." 아이의 대답에 희망이 보인다. 질문이 창피가 아니라 생각의 증거가 되는 교실. 그곳에서 진짜 AI 시대를 이끌 아이들이 자랄 것이다.
회의실에서 침묵했던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 이제 그 침묵을 깨뜨릴 때다. AI 강국이 되려면 최첨단 알고리즘보다 질문할 수 있는 용기와 그 질문을 환영하는 문화가 먼저다. 질문은 무례가 아니라 사유의 시작이다. 질문의 힘이야말로 AI 위에 서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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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객원기자 kyhi68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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