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ctn]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천만에 말씀이다. 늦게 시작한 공부는 더 무섭다.

70세의 나이에 복지신학과에 입학한 늦깎이 신입생 허영남 씨의 이야기가 배재대학교 안팎에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허 씨는 "나이 먹고 다시 학교에 다닌다는 게 부끄러워 망설이기도 했지만 후회할 일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체력이 다하는 날까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새내기다운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 30년 군생활 후 만학도 길…검정고시 거쳐 "내친김에 대학까지"

허 씨는 충남 당진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는 누구라도 가릴 것 없이 나라 전체가 살림이 어려웠던 시기다.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중학교까지 학업을 마친 허 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더 이상 배움의 길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허 씨는 1965년 군에 입대하게 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통신병으로 입대한 허 씨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힌 꼼꼼하고 부지런한 생활과 일머리로 선임병과 간부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당시 군복무 기간은 36개월이었는데 제대할 무렵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으로 복무 기간이 늘어나게 되면서 허 씨는 아예 장기복무를 결심하게 됐다.

이어 1968년에는 전투병으로 월남에도 파병됐다. 백마부대 소속으로 투이호아에 투입된 그는 생과 사를 오가는 숱한 전투현장을 경험했다. 동굴 수색을 하며 베트콩들과 육박전을 벌이는 상황도 부지기수였다. 전투현장 어디에서나 최전선에 서며 많은 공훈을 쌓은 그에게 국가는 당시 군인에게는 최고 영예인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듬해 귀국한 그는 고향 당진에서 가까운 논산훈련소로 배치, 오랜 세월 동안 부대지킴이로 복무한 입대 30년만인 1993년말 정들었던 푸른 군복을 벗게 된다. 제대 당시의 계급은 원사. 직업군인으로서 빼어난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은 이들만 달 수 있는 계급장이다. 그 사이 아내 최명숙 씨와도 결혼해 큰딸과 두 아들을 얻었다.

월남전 당시 미군은 작전에 방해가 되는 밀림을 고사시키기 위해 다량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당시 고엽제가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던 많은 수의 한국군들이 이 고엽제에 노출됐고 귀국 후 시간이 지나며 많은 부작용을 보이기 시작했다. 허 씨 역시 그들 고엽제 피해자 가운데 한명이다.

그의 장성한 자녀들은 이미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소일로 시간을 보내도 좋을 노년의 나이다. 또 고엽제 후유증으로 청력과 운동신경도 많이 떨어진 상태.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중도에 그만둬야 했던 배움의 길로 다시 나선 것이다.

지난 2011년, 허 씨처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공부의 때를 놓친 이들이 공부하는 대전예지중·고교에 입학했다. 근 50년 만에 다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방금 수업시간에 배운 것도 금세 다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허 씨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를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귀가 잘 안 들려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고, 시험 기간에는 새벽 먼동이 틀 때까지 책을 파고들기를 2년. 114명의 학생 중 4~5등을 유지했던 허 씨는 마침내 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배움은 꼭 수학이나 영어만이 아니었다. 모교 사랑의 마음도 전에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허 씨는 "남들이 볼 때 운동장도 없고 학교라고 하기엔 보잘것없는 공간이었지만 배움에 목말라 온 사람들, 누구 아빠 누구 엄마라고만 불렸던 우리들이 자기 이름으로 춤도 추고 그림도 그리고 발표도 하며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갖게 해준 곳이다. 나이든 학우들과 같이 얼싸안고 울 때도 많았다"고 예지중·고 시절을 회상했다.

◆"동기들과 편하게 어울릴 것…힘 주신다면 졸업 후 이웃 돕고파"

배움에 대한 열망은 끝이 없는 것.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보니 이제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던 대학 공부까지 욕심이 났다. 예지중·고에 입학식에서 졸업생들의 대학 입학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보며 잠시 가슴 설렜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자녀들은 “기왕 가는 것 4년제로 가라”며 그의 열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2월 5일 졸업식이 있는 예지중·고에서 그는 이미 스타다. 전문대학이나 특수목적대학이 아닌 번듯한 사립대학에 진학한 졸업생은 14년 만에 그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보훈청에서는 그의 이런 특별한 사연을 부대를 순회하며 강연해달라는 요청도 해왔다.

괴정동에 사는 이웃 주민으로 배재대학교를 자주 방문해 그리 낯설지 않다. 합격통지를 받은 뒤에는 미리 와서 복지신학과 교수님도 뵙고 공부할 도서관도 둘러보았다. 허 씨를 만난 교수님은 "고생하시겠다"면서도 "그렇다고 다른 학생들과 달리 특별히 편의를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엄포 아닌 엄포를 놓기도 했다고.

앞으로 4년간 복지신학을 전공하게 될 허 씨는 심리학이나 상담에도 관심이 많다.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한글도 못 깨우친 이들이 많음을 알게 된 그는 문맹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부끄러움에 쉽게 마음을 못 여는 이들이기에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심리 상담도 필요할 듯하다”는 게 허 씨의 생각이다. 일선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며느리들에게도 도움을 받기로 약조를 해 놓았다.

꽃피는 춘삼월, 배재대학교 캠퍼스를 함께 거닐게 될 동기들에게 허 씨는"나이 차이를 초월해서 같은 학생으로서 서로 도움을 주면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다들 편하게 대해주기를 바래요. 또 요즘은 모든 학업이 컴퓨터로 이뤄지는데 아무래도 내가 익숙지 못하니 자주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아요"라며 미리 이런 인사를 전했다.

또한,만학도의 길을 한마디 불평 없이 뒷바라지 해준 아내에게도 "지난 2년간 공부하며 아프다고 할 때 병원도 못데려다 주고 미안한 마음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또 4년을 더 공부하게 됐으니 참 면목이 없습니다. 부족한 사람 만나서 여러 가지로 뒷바라지해주고, 자식들 잘 키워주고, 걱정 없게 공부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 덕이에요"라고 고마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