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회]최재형, 대동공보에 특별자금 보내
문영숙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가금현 기자입력 : 2024. 05. 27(월) 15:49
문영숙 이사장
[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 항일운동가 최재형/CTN]최재형은 대동공보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일어난 지 이틀 뒤인 1909년 10월 28일, 의거 기사를 특집으로 보도했다.

그 후에도 대동공보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정황들에 대한 기사들을 계속 내보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일본에서는 이러한 대동공보를 감시하면서 최재형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재판 내내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의 수장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으니 만국공법에 의해 포로대우를 해 달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 변호사, 일본법정, 일본법에 의해 안중근 의사를 단순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시켰다.

그 후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와 안중근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안의사의 동생들은 연해주로 망명했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은 우수리스크에 살았다고 한다. 1911년 2월에 작성된 일본의 첩보자료는 안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안공근이 최재형이 사는 얀치혜에 빈번하게 출입하고 있으며, 안의사의 처자가 지금 얀치혜 최재형 방에서 쉬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한 1912년에도 안의사의 부인과 어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선생의 집을 방문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최재형 선생의 딸 올가의 기록에도 자신의 어머니가 안중근 의사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음식과 옷가지를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 순국 후에도 계속해서 안중근의사의 가족들을 보살폈음을 알 수 있다.

한일 병합을 코앞에 둔 1910년 8월 20일 자 「대동공보」는 무력하게 일제에 침탈돼 가는 조국의 운명을 직시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피를 흘리는 방법 뿐"이라고 절규하였다. 또한 기록에 보면 최재형은 노우키에프스크 한족민회장(韓族民會長)으로서 한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당시 연해주에 거류하는 재한인으로서 최재형의 원조를 받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 같은 활동 중에도 노우키에프스크에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진력하는 한편, 유류제조소를 두어 경영하였다. 이 제조소에는 교포 인부 약 1백여 명을 채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일단 유사시에는 항일단체인 의병으로써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후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병합했다. 이미 일본 제국은 한국 병탄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1905년 6월 러일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해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태프트는 필리핀 방문 전에 일본에 들러 가쓰라와 만나 미국의 대 필리핀 권익과 일본의 대조선 권익을 상호 교환조건으로 승인하였다.
협약 내용은
첫째, 미국과 같은 친일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대하여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적 의도를 갖지 않으며,
둘째, 극동의 평화유지는 일본,·미국,·영국 정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 동시에 유일한 수단이며,
셋째,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비밀협정은 20세기 초 미국의 동아시아대륙정책의 기본 방향에서 나온 것으로,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 간에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열리기에 앞서 이미 한국에 대한 태도를 밝혔던 것이다.
즉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있게 통치한다면 만인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고 피력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였다.
이 비밀협정에 의해서 미국의 한국문제 개입의 가능성을 배제시킨 일본은, 같은 해 8월에 제2차 영일동맹, 9월에 포츠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국제적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일찍이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이 협정의 내용은 1924년까지 양국이 극비에 붙였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한일병합 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러시아에서는 최재형과 가장 밀접하게 구국운동을 펼쳤던 이위종의 아버지이며, 러시아 공사인 이범진이 자결했고, 국내에서도 충정공 민영환, 매천 황현선생등등, 전국적으로 애국지사들의 울분이 들끓었다.
한일병합 이후 최재형도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들었다. 일본은 최재형을 러시아의 손을 빌려서 처치하기로 결정하고 첩보원들을 동원했다.

참고서적 :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의리를 지키며 살고싶다.
술은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마셔라!
내가 그자리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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