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충남학자료총서 4호 '국역 석호집'
- 소주가씨의 역사와 석호집의 사료적가치
박순신 기자/이재필 기자입력 : 2022. 10. 04(화) 11:52
소주가씨의 역사와 석호집의 자료적 가치 학술세미나/박순신 기자
[기획/CTN]이재필 기자/박순식 기자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원장 조한필)은 지난 30일 태안문화원에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충남학자료총서 4호 ˂국역 석호집˃ 발간기념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세미나는 '소주가씨의 역사와 석호집의 사료적가치'라는 주제로 박현규 순천향대학교 교수의 '임진왜란 시기 소주가씨 해동조 가유약의 행적과 문학', 이근호 충남대 교수의 '조선후기 소주가씨 문중의 역사와 주요인물', 정욱재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의 '석호집을 통해 본 가행건의 학문과 사상', 박범 공주대 교수의 '석호집에 나타난 19세기 태안 안흥진성의 실상'이 발표됐다. 이어 토론에는 김경수 청운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고, 정만호 충남대학교 교수, 홍제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백제충청학연구부장, 이병찬 우송대학교 교수, 문광균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박물관운영부장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조한필 원장은 개회사를 통해 "해양 경관이 아름다운 태안군은 역사적으로 해양사, 해양문화자원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며, 오늘 학술세미나의 주제인 가행건의 《석호집》도 태안의 해양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석호집》은 1870년(고종 7) 가행건 아들 가일영에 의해 간행된 문집으로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가유약의 후손으로 전란이 끝난 후 태안군 일대에 정착하였는데, 이들이 현재 소주가씨"라고 했다.
이어 "1798년(정조 22) 태안군 남면에서 태어난 가행건은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부호군, 오위장, 안흥첨절제사 등을 지낸 인물로 무관직의 무장이었으나, 김유근과 김좌근 문하에서 수학하여 시문에도 능했고, 《석호집》은 이러한 가행건의 학문과 사상을 알 수 있는 저작으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포함하여 2곳에서 그 실물이 전하고 있으며,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는 매년 충남의 주요 역사사료를 '충남학자료총서'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고 있는데. 올해는 가행건의 문집을 번역하여 《국역 석호집》을 간행, 오늘 학술세미나는 태안군의 소중한 역사 사료인 《국역 석호집》을 간행함과 동시에 소주가씨의 역사와 《석호집》의 가치, 가행건의 행적을 살피기 위한 자리"라고 말했다.
가세로 태안군수는 "선선한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때에, 소주가씨의 역사와 석호집의 사료적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국역 석호집 발간기념 학술세미나가 개최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오늘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신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조한필 원장님, 이충일효문화연구원 가갑손 이사장님을 비롯해 바쁘신 중에도 오늘 세미나에 참석해 주신 발표자와 토론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우리나라 소주가씨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병부상서와 계요도찰사를 맡고 있던 가유약 으로 그의 고향은 중국 강소성 소주로 임진왜란 때 원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워 무공을 세웠고, 또 가유약은 정유재란시에 아들 가상과 손자 가침도 함께 3대가 참전하였는바, 부자 동순(同殉)의 충의와 손자 조선 잔류 효행의 이충일효 정신은 동서와 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백행의 근본이며 인간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써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 길이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19세기 헌종 때 충무위 부사용을 지냈고 철종 때에는 충청도 안흥량진 수군 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한 가행건의 석호집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특히 당시 안흥지방은 전복과 해삼이 특산으로 궁중에 올리는 진상품이었는데, 엄동설한에도 백성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드나들며 전복, 해삼을 따다 바쳐야되는 민폐의 시정에 대해 강력히 건의해 진상공납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고달픔을 덜어 목민정신과 애민정신을 몸소 실천했다"고 말했다. 가 군수는 또 "오늘 학술세미나는 소주가씨 문중의 역사와 석호집을 통해 본 가행건의 학문 과 사상, 19세기 태안 안흥진성에 대하여 검토하는 자리가 될 것이며, 세미나를 통해 얻어진 학술성과는 태안군 역사문화적 위상을 한층 높이는 것은 물론이며, 역사를 탐구하여 우리 자신과 지역에 대한 지식을 쌓아 더 잘 사는 태안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충일효문화연구원 가갑손 이사장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이번 ˂국역 석호집˃ 발간기념 학술세미나는 국가지정문화재 태안 안흥진성 관련 사료로서의 학술적 가치와 충남학 연구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하고 "《석호집》이 후대 우리에게 남겨준 의미는 바로 ‘충효(忠孝)’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사실이며,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도(孝道)는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백행의 근본이고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최고의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충일효문화연구원은 가유약 3세가 남기신 충효사상을 소주가씨 문중에 국한하지 않고 나아가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한 젊은 세대와 청소년들의 인성, 진로, 교육을 지원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소주가씨 후예들은 나라를 구한 황조인(皇朝人) 후예로서 여러 선조들이 벼슬길에 올라 여러 방면에서 역할을 해왔으며, 170여 년 전인 19세기 중엽 13대손인 가행건(賈行健) 선조와 함께 일영(日永), 중영(中永) 두 자제분의 눈부신 활약으로 소주가씨의 중흥(中興)을 일으킨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 특히 행건 중영 부자는 안흥첨절제사(安興僉節制使)로 근무한 몇 안 되는 충남출신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안흥진성 복원사업에 본 책자 《석호집》이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충분히 있는바 장차 안흥진성에 복원될 검소루, 제승루에 안흥진성을 다스린 가 행건의 시문이 반드시 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 이사장은 "오늘 학술세미나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주신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님과 충남역사문화원 조한필 원장님, 민정희 박물관장님 그리고 실무를 총괄해주신 문광균 박사님과 연구진 여러분들, 그리고 2충1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13년 동안 전국 백일장 대회를 개최해오고 있는 적돌문학회 가금현 회장과 관계자 모든분들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시기 소주 가씨 해동조 가유약의 행적과 문학>
-박현규 순천향대학 교수
16세기 말에 조선 땅에서 일어난 동아시아 국제 전쟁인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의 구성원을 다양 하게 만드는 커다란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씨 가운데 임진 왜란 때 조선 참전에 나선 명나라 인사를 시조로 둔 집안이 꽤 존재한다. 이들 집안이 한반도에 정 착하게 된 과정은 여러 형태이지만, 모두 부득불 본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가졌다. 이들 집안의 후손은 우리 영토에 여러 대를 이어가며 뿌리를 내리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 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집안 중 하나가 본 논제에서 다루는 소주(蘇州)가씨(賈氏)이다.
소주가씨의 해동조 가유약은 임진왜란 때 두 차례 조선에 들어왔다. 한 번은 1593년(선조 26) 에 흠차사험군공병부무선청리사주사(欽差査驗軍功兵部武選淸吏司主事)로 명군의 공적을 감찰하고 신종이 내린 군공 칙서와 은전을 반포한 뒤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또 한 번은 1599년(선조 32) 에 원임(原任) 병부직방사랑중(兵部職方司郞中)으로 경리 만세덕(萬世德)을 보좌하며 일본군의 재 침을 방비하는 선후책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유약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나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단적인 실례가 현시점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가유약을 대상으로 분석한 어떠한 선행 연구물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임진왜란사에서 전투, 장수, 외교 위주로 연구되는 분위 기로 인해 문신 출신 가유약에 대한 관심 부족이나 사료가 많지 않은 점에서 나왔겠지만, 무엇보 다도 우리가 가유약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과 정성이 부족한 점도 큰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임진왜란의 실체를 올바르고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국내외에 산재된 자료를 종합해서 다양한 각도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 문무장리(文武將吏)들의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하여 그들이 남긴 행적과 자료를 파악하는데 많은 노력을 펼쳤다. 일전에 가 유약의 후손인 가행건(賈行健)의 《석호집(石湖集)》을 번역하였다. 이번에 필자가 그동안 수집했던 가유약의 각종 자료를 가지고 임진왜란 시기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과 문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규명해 본다. -중략-
가유약은 뛰어난 문재를 가진 전통 문사였다. 경적을 섭렵하여 다양한 지식을 갖추었고, 글씨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특히 악부, 산곡 등 여러 시체에도 능했다. 조선 사관과 실록에서도 가유약의 문재가 빼어나다고 평할 정도였다. 가유약은 《청원사고(靑原詞稿)》, 《영물근체(詠物近體)》, 《쌍청 집(雙淸集)》, 《전석기전(前席記傳)》 등 여러 문집을 남겼으나 오늘날 전해오는 작품은 많지 않다. 다만 <무종동(無終洞)>, <보주산조망(寶珠山眺望)>, <숙서흥관운(宿瑞興館韻)>, <부산평왜비명(釜 山平倭碑銘)>에서 가유약의 빼어난 문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가유약이 조선에 머물고 있을 때 당대 최고의 문사로 알려진 차천로, 허균 등과 학문 교류가 있었으며, 특히 허균에게 해외에서 자신의 문재를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그리고 오명제가 편찬한 《조선시선》의 교정 작업 에 참여하여 수준 높은 한국 한시를 중국 문단에 소개하는데 일조했다. 또 가유약은 임진왜란 때 위난에 빠진 조선의 국운을 도와준 인사였다. 이 모든 것이 역사 기록에 기술되어 있다.

<조선후기 소주가씨 문중의 역사와 주요 인물>
- 이근호 충남대학교 교수
본고에서는 이 같은 관점에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정착한 소주가씨(蘇州賈氏)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조선에 정착한 소주가씨에 대해서는 주로 가문에서 간행한 자료3)를 통해 서 소개되었고, 이밖에도 태안반도의 촌락에 대한 검토 과정에서 소주가씨를 언급한 연구가 있 다.4) 학문적 검토가 거의 진행된 바가 없다고 하겠다. 아래에서는 선행 연구를 참고하면서 조선 후기 소주가씨의 본관 유래를 비롯해 그들이 태안에 정착하는 내력을 살펴보고, 이어서 후손들의 계파 형성 및 거주지 변동과 관직 진출 인물 등에 대해서 추적하고자 한다.
가국의 국도(國都)는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 양분현(襄 汾縣) 일대인데, 족보에서 굳이 소주를 언급하는 것은 본관인 소주가 중국의 동일 지명에서 유래 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소주가씨대동보》에서 가유약(賈維鑰)을 중시조(中始祖) 로 표현하고 있는 것 역시 소주가씨가 중국 가씨에서 유래한 것임을 명시한 부분이다.
소주가씨는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의 일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가유약(賈維鑰)을 시조로 한 다. 가유약의 자는 무경(無扃)이고 호는 지백(知白)이며, 명의 직례(直隷)인 순천부(順天府) 준화현 (遵化縣) 출신이다. 1583년(만력 11, 선조 16)에 진사가 되었다. 가유약은 주사(主事)의 직함을 띠 고8) 1593년(선조 26) 명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조선에 나와 있던 송응창(宋應昌)의 경략아문(經略 衙門)에 가서 효유하였다. 가유약의 주 업무는 명나라 군사의 군공을 조사하고 군대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칙사를 그대로 보낼 수 없다며 안주(安州)나 정주(定州)에서 전위연(餞 慰宴)을 거행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9)
가유약은 이후 1599년(선조 32) 윤4월에 낭중(郎中)의 직함을 띠고 조선에 파견되었다.10) 경리 (經理) 만세덕(萬世德)을 보좌하기 위한 것이었다.11) 윤4월 7일과 윤4월 9일,12) 윤4월 11일,13) 8월 14일,14) 8월 15일,15)10월 5일,16) 10월 7일17) 등에 국왕과의 만남을 가지기도 하였다. 윤4월 11일 만남에서는 다음과 같이 병농분리(兵農分離)라는 군비(軍備) 강화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귀국의 문관 중에 지모 있는 선비가 많으니 반드시 남김없이 계책을 세우리라 봅니다. 귀국 이 잔파되기는 했어도 팔도의 군병을 모으면 수만 명은 얻을 수 있으니 험지와 요새지에 웅거 하여 군대 훈련과 둔전, 그리고 농사를 권장하는 등의 일을 차례로 거행한다면 뒤처리할 계책이 없다고 걱정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천조는 군대와 농사를 둘로 분리하여 각기 본업이 있는 데, 제가 들으니 귀국의 전사들은 다 스스로 군량을 소지하고 3개월 만에 교대한다고 하였습니 다. 이미 전쟁에 나가게 하면서 또 스스로 군량까지 짊어지고 가게 하는 것은 이른바 ‘천리길에 군량을 가지고 가니 군사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군대란 담력을 키우는 훈 련이 최고니 담력을 키우지 않으면 만 근을 드는 힘이 있어도 쓸 수 없는 것입니다."18)
가유약이 1599년 조선에 파견되었던 당시 아들 가상(賈祥)도 도사(都司)의 직함을 띠고 조선에 파견되었다.19)
가상은 1만2천5백여명의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마귀(麻貴) 제독 휘하에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남 원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이어 동래 부산포구에 진출하여 전투를 치르던 중 외원(外援)이 끊겨 부친 가유약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전한다. 이때 가상의 아들 가침(賈琛)이 병부종사관으로서 분투 하여 같이 죽고자 하였으나, 마귀 제독의 만류로 그쳤다. 그리고는 조부인 가유약과 가상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생진 도독동에 임시로 장례를 지냈다. 이후 마귀 제독이 가침의 환국을 권유하였으나, 가침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마귀가 권순(權純)에게 가침을 사위로 삼도록 하고, 묘소를 수호하도 록 하였다고 한다.22) 처부인 권순의 본관은 안동으로, 1551년(명종 6) 알성시에 급제한 인물로, 강 원도 도사와 시강원 필선과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나주목사, 진주목사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중략-
한편 소주가씨의 인물 중 주목되는 인물이 가행건인데,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적 소양을 함양하였으며, 성장해서는 안동김씨 김좌근이나 김흥근 등의 지원과 후원 속에서 안흥진첨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가행건 이외에도 가중영이나 가일영, 가우영, 가기영 등은 무과나 충량과를 급제하고 첨사나 오위장 등을 지냈다.

<《석호집》을 통해 본 가행건의 삶과 경세론>
- 정욱재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賈行健(1798~1865)은 다사다난한 19세기 전반기를 살며 말 년에 ‘임술민란’을 경험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다행히 《石湖集》5)이라는 문집을 남기고 있어 가행 건 본인이 평소 지녔던 생각과 현실인식 등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 이 글은 우선 그가 남긴 문집 《석호집》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에서 생소한 가행건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그의 가계와 활동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다음으로 그가 남긴 〈三政對策〉을 통하여 그의 경세론 이 지닌 특징의 일단을 파악하고자 한다. -중략-
가유약-가상-가침으로 이어지는 3대가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에 와서 도왔던 행적은 가행건을 비롯하여 소주가씨 구성원들에게 큰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이후 지방 읍지에서 태안지역의 성씨를 거론할 때 소주가씨는 나란히 거론되는 가문으로 인정받았다.
황조유민의 가문에서 태어난 가행건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이 대단하며 재주가 명민하여 4 세 때 글을 배우고 6세에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중략-
가행건은 안흥첨사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안흥진의 현황과 거주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살펴보았다. 그가 지은 ‘海溢’이란 시 한 수를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衝波決洑走良田파도의 충격으로 보 터져 良田으로 달려가니 極目平沙轉渺然눈길 닿는 데까지 끝이 없는 모래펄이 되었네. 欲睹禾苗無覔處벼 싹을 보고 싶어도 찾을 곳은 없고
提笻爲向地中穿지팡이 짚고 향하는 곳마다 땅 속만 뚫어가네.33)
바닷가를 끼고 있는 곳은 늘 자연재해를 피할 수가 없는 법으로, 해일이 일어날 때마다 백성들이 공들어 농사를 지은 땅이 모래로 뒤덮이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그가 관할한 지역은 척박한 토지 로 곡식도 잘 자라지 않는 곳인데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여 백성들이 바다에서 생계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현장을 찾아가서 백성들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였다. -중략-
황조유민의 후손이란 점과 김좌근의 후원으로 1853년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안흥첨사가 되어 자신의 경륜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는 안흥첨사로서 백성의 고단한 삶을 직접 살피고 그것을 해결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할지역에서 세곡선 1척이 패선되는 불행한 상황으로 인해 만 2년도 채 못 되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흥첨사를 마지막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지 않고 향리에서 후손과 후학을 가르치는 등 ‘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 그후 1862년 임술민란을 목도하자 철종의 책문에 적극 호응하여 65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압축한 〈三政對策〉을 작성하였다.

<《석호집》에 나타난 19세기 태안 안흥진성의 실상>
- 박범 공주대학교 교수

안흥진은 고려시대 이래 삼남지방에서 한성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삼남 지방의 어떠한 선박도 안흥진 앞 바다를 거쳐야 한강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안 흥진의 역할은 매우 커지고 다양했다. 그러한 결과 안흥진에 산성이 축조되었고 창고가 건립되었 으며 산성을 보호하기 위한 군제가 편성되었다.
대동법 시행 이후 세곡선의 수가 증가하면서 안흥진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조운선을 호송해야 하는 업무가 매우 중요해졌다. 이를 단속해야 하는 책임 또한 안흥진에 주어지면서 첨사의 역할도 강화되었다. 안흥진은 본래 수군진으로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산성을 관리해야 했으며 창고 를 책임지고 조운 관리도 맡았다. 안흥진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기능과 역할이 주어지면서 이를 안정적으로 제도화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중략-
사실 안흥진 거주민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될 만한 내용은 진상물 상납(上納)과 관련된 것이다. 《첩보선집》에는 두 종류의 진상물 관련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진상용 생복(生鰒)에 대한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사유환(蛇油丸)이다.
전복은 일찍부터 안흥진 경내 백성들이 내의원에 올리던 진상품이었다. 《내의원식례》에 따르면 내의원에 바치는 물품으로 연례진상(年例進上)과 연례복정(年例卜定)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복은 복정(卜定)에서만 확인된다. 연례복정 중에서 유갑생복(有匣生鰒)은 충청수영과 황해수영에서만 올리도록 하였는데 안흥진은 바로 충청수영에 속하여 해당 진상물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중략-
안흥첨사를 지낸 인물 중에서 문집 혹은 저서를 남긴 인물은 많지 않다. 이 중에서 눈에 띠는 인 물은 가행건(賈行健, 1798~1865)이다. 그는 1853년(철종 4) 6월, 안흥첨사에 임명되었다.88) 그 리고 안흥첨사에 약 2년 여 간 재임하였다. 그는 《석호집》이라는 문집을 남기면서 선정비(善政碑) 가 건립된 유일한 안흥첨사로 보인다. 그의 문집에도, 그리고 선정비에도 그가 안흥첨사로서 남긴 흔적들이 확인된다. 행장(行狀)에 따르면 그는 안흥첨사에 임명되어 ‘민초들을 자식과 같이 돌보았다. 돌아갈 때 민 초들이 성 동문 안에 마애비(磨崖碑)를 세웠다’고 기록하였는데89) 그 마애비가 선정비로 보인다. 정식 이름은 가행건애민선정비(賈行健愛民善政碑)이다. -중략-
1853년 안흥첨사로 임명된 가행건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안흥진을 관리하였다. 그는 지형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관점에서 안흥진 백성들의 폐단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를 실행할 수 있었다. 그가 본 안흥진의 경관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흥첨사로서 주어진 역 할을 수행해야 했고 그가 보기에 우선 순위는 당면한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전문>
임진왜란 시기 소주 가씨 해동조 가유약의 행적과 문학
- 박 현 규(순천향대학교 교수
1. 서론
16세기 말에 조선 땅에서 일어난 동아시아 국제 전쟁인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의 구성원을 다양 하게 만드는 커다란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씨 가운데 임진 왜란 때 조선 참전에 나선 명나라 인사를 시조로 둔 집안이 꽤 존재한다. 이들 집안이 한반도에 정 착하게 된 과정은 여러 형태이지만, 모두 부득불 본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가졌다. 이들 집안의 후손은 우리 영토에 여러 대를 이어가며 뿌리를 내리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 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집안 중 하나가 본 논제에서 다루는 소주(蘇州) 가씨(賈氏)이다. 충남 태안군 태안읍 에서 남쪽으로 안면대로를 따라 한참 내려가면 남면이 나오고, 남면을 조금 지나면 양장1 교차로 가 나온다. 여기에서 동쪽 망재(望嶺) 방향으로 꺾어 2㎞ 정도 들어가면 숭의사(崇義祠)가 나온다. 숭의사는 가유약(賈維鑰) -- 가상(賈祥) -- 가침(賈琛), 즉 임진왜란 때 참전에 나선 소주 가씨 해 동조 삼대를 기리는 사당이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300호이다. 숭의사 아래쪽 양잠 1리가 소주가씨의 집성촌이다. 소주가씨종친회관은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에 있다.
소주 가씨의 해동조 가유약은 임진왜란 때 두 차례 조선에 들어왔다. 한 번은 1593년(선조 26) 에 흠차사험군공병부무선청리사주사(欽差査驗軍功兵部武選淸吏司主事)로 명군의 공적을 감찰하 고 신종이 내린 군공 칙서와 은전을 반포한 뒤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또 한 번은 1599년(선조 32) 에 원임(原任) 병부직방사랑중(兵部職方司郞中)으로 경리 만세덕(萬世德)을 보좌하며 일본군의 재 침을 방비하는 선후책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유약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나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단적인 실례가 현시점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가유약을 대상으로 분석한 어떠 한 선행 연구물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임진왜란사에서 전투, 장수, 외교 위주로 연구되는 분위 기로 인해 문신 출신 가유약에 대한 관심 부족이나 사료가 많지 않은 점에서 나왔겠지만, 무엇보 다도 우리가 가유약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과 정성이 부족한 점도 큰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임진왜란의 실체를 올바르고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국내외에 산재된 자료를 종합해서 다 양한 각도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 문무장리(文武將吏)들의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하여 그들이 남긴 행적과 자료를 파악하는데 많은 노력을 펼쳤다. 일전에 가 유약의 후손인 가행건(賈行健)의 《석호집(石湖集)》을 번역하였다. 이번에 필자가 그동안 수집했던 가유약의 각종 자료를 가지고 임진왜란 시기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과 문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규 명해 본다.
2. 가유약(賈維鑰)의 행적 고찰
먼저 가유약의 자호부터 살펴본다. 문헌에 따라 조금 다르다. 《임진필록(壬辰筆錄)》과 《상촌집 (象村集)》에는 자가 무경(無扃), 호가 지백(知伯)이라고 적었고, 《[강희]준화주지(遵化州志)》에는 자 가 지백(知伯), 《[광서]준화통지(遵化通志)》에는 자가 지백(智伯)이라고 적었다.
가유약의 원 고향은 하북 준화(遵化)이고, 부친은 병부우시랑 가응원(賈應元)이다. 1582년(만력 10)에 순천부 향시에 급제했다. 당시 준화 인사들은 향시 급제한 가유약, 마사공(馬思恭)、유서(劉 栖)、구양난(歐陽煖) 등을 기리기 위해 준화 성동가(城東街)에 사준방(四駿坊)을 세웠다. 청 광서 연간에 아직 남아 있었다.1) 또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준화에 가응원, 가유약 부자를 기리는 사마방(司馬坊)이 세워졌다. 청 광서 이전에 훼멸되었다.2) 1589년(만력 17)에 가유약은 진사에 급 제하여 본격적으로 관료 생활에 나섰다.3)
임진왜란 때 가유약은 조선에 두 차례 들어왔다. 1593년(만력 21) 3월에 도찰원(都察院)의 명을 받아 흠차사험군공병부무선청리사주사(欽差査驗軍功兵部武選淸吏司主事)의 직분으로 첫 번째 조 선에 들어왔다. 이때 가유약이 맡았던 임무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압록강 강가, 즉 의주에서 명군의 군공을 감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安州에서 명군의 노고을 치하하는 황제의 칙서와 은 전을 반포하는 것이다.4) 가유약이 가져온 칙서 원문은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 권9 <사호상 장사소(謝鎬賞將士疏)>에 수록되어 있다. 선조는 가유약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신(侍臣) 을 보내어 안주나 정주에서 전위연(餞慰宴)을 베풀 계획을 세웠으나, 가유약이 경략 송응창(宋應 昌)에게 칙서와 은전만 반포하고 이내 돌아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5)
《신종실록(神宗實錄)》에 의하면 1595년(만력 23) 10월에 낭중 가유약은 명 조정이 실시한 감주 (甘州; 현 장액[張掖])에서 몽골군을 물리친 공적을 치하하는 포상에서 은량을 받았다.6) 이때 가유 약의 직급이 낭중이다. 낭중은 상서(尙書), 시랑(侍郎)의 밑에서 각 부처의 사무를 관장하는 원외 직(員外職)이다. 《임진필록》에 가유약이 병부직방사랑중(兵部職方司郞中)에 올랐던 연도를 1596 년(만력 24)으로 적었는데,7) 그 전해에 승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1596년(만력 24) 5월에 가유약은 예부와 병부에서 섭계고(葉繼羙) 사건을 빨리 처리하지 않았 던 일로 인하여 혁직되었다.8) 당시 섭계고 사건처리를 담당한 관리들은 모두 엄한 처분을 받았다. 그 처분은 겉으로 사건처리를 빨리 처리하지 못한 것에서 나왔지만, 실상은 신종제가 섭계고 사건 을 빌미로 관료들을 정풍하겠다는 숨은 의도가 깔려 있었다. 병부직방사낭중을 맡은 지 얼마 되지않은 가유약이 혁직이라는 엄한 처분을 받은 것은 다소 지나쳤다고 할 수 있다.
1599년(만력 27)에 가유약은 두 번째 조선 방문이 이루어졌다. 가유약은 원임 병부직방사낭중 의 신분으로 경리 만세덕의 아래에서 일본군의 재침을 막는 선후책을 도모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 왔다.9) 윤4월 7일에 선조와 가유약은 처음 대면했다. 선조가 모화관에 행차하여 한양으로 들어오 는 가유약을 맞이하고 지난번 안주에 들어왔다가 급히 되돌아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 에 멀리 오셔서 만나게 되니 기쁘다는 말을 했다. 이에 가유약은 도찰원, 즉 명군 군공을 감찰하는 임무로 들어와 폐를 끼친 일이 많아 미안하다며 겸허하게 답변했다.10)
이틀 후인 9일에 선조가 가유약의 관소에 행차하였다. 가유약이 국왕의 성덕과 큰 복을 언급하 며 덕담하자, 선조 또한 황제의 재조에 힘입어 그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며 덕담으로 화답했다. 이어서 가유약은 선후책을 경리 만세덕과 상의해서 처리할 것이라며 자신이 조선에 체류하게 된 목적을 알렸다.11)
당시 가유약이 조선에서 맡은 주된 업무는 선후책, 즉 난후 방비책이다. 1598년(선조 31) 11월 에 조명연합 수군과 일본 수군이 노량 앞바다에서 맞붙은 대규모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동안 끌 어오던 임진왜란이 사실상 막을 내렸지만, 이후 조선 조정과 명 군부는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 공해오는 것을 방비하는 선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윤4월 11일에 가유약이 선조를 찾아가 예물 단자를 올리면서 선후책을 논의했다. 가유약이 선 후책의 운영에 대해 조선이 어떻게 지원함에 따라 달려있다고 말하자, 선조는 전란으로 인해 국토 가 전파되어 군사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군량도 떨어졌다며 대책 마련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 에 가유약은 조선이 피폐한 상황이지만 군사 대비책을 마련할 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고, 군대란 담력을 키워야 한다며 힘껏 도모할 것을 요청했다.
이어서 가유약은 명군과 조선군 사이에 군사 운영의 차이점을 말해 주었다. 명나라는 군사와 농 사를 분리하고 군사에 필요한 군량을 후방에서 지원해 주는데, 조선은 군사가 스스로 군량을 마련 해서 3개월씩 교대로 근무한다. 군사가 천 리 길에 나서는데 군량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조치는 해당 군사를 굶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처럼 가유약은 당시 조선군이 가지고 있는 군사 운영의 커다란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12)
기실 조선 조정은 선후책을 원만하게 운영하기에 상당히 벅찼다. 자국의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 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국토가 피폐해진 현실에서 모든 것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특히 군량의 절대 부족은 전란 초기부터 해결하기 어려운 큰 고민거리였다. 조선 조정은 명 군부와 명 군 잔류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되도록 많은 숫자의 명군을 오랜 기간 주둔시키고 싶었으나, 명군에 게 제공할 군량 부족으로 조선에 주둔할 군사의 인원수를 대폭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선조와 가유약은 여러 차례 만나거나 문서를 주고받으며 현안을 논의했다.13) 이때에도 침 공 방비와 군사 교련, 군량 부족과 비용 등 선후책이 주요 과제였다. 한번은 가유약이 선조와 만나 는 자리에서 일본에 붙잡혀갔다가 복건을 통해 귀환한 노인(魯認)의 첩보에 대해 일본군이 침략해 오는 것을 사전에 방비하는 것이 최선이고, 또한 유격 송대빈(宋大斌)이 조선군을 교련시키면 충 분한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건의했다. 노인은 1597년(선조 30)에 남원성 부근에서 일본군에 의해 나포되어 일본열도로 끌려갔다가 1599년(선조 32)에 명 차관 임진혁(林震虩)의 선편으로 탈주하 여 복건, 북경을 통해 조선으로 귀환했다.
한 번은 가유약은 조선에 게첩(揭帖)을 보내 주둔 명군의 생활 여건이 몹시 열악한 상태이오니 관공(館供)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호소했다. 명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게 된 것은 조선 의 요청에서 나왔다. 명나라는 조선을 위하여 환란을 입을까 봐 염려되어 군사 주둔에 동의하여 춘신(春汛) 방어에 나섰고, 조선 또한 명군 주둔에 대해 정성을 다해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조 선 관아가 명군에게 제공해 줄 군량이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지금 날씨가 춥고 해가 짧은 계절 인데 땔나무, 숯, 기름, 촛불 등 하찮은 물품조차 제공되지 않으며, 또한 저자에서 구할 수가 어려 워 군영을 지탱하기가 어렵다. 또 조선이 주둔 명군을 속히 철수시키고자 경비를 줄이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여기에 대해 국왕께서 널리 살펴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하였다.14)
이에 대해 선조는 이정귀(李廷龜)에게 시켜 회게(回揭)를 대신 작성하여 보내도록 했다. 주둔하 는 명군의 숫자가 많고 적음은 조선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데, 어찌 명군 철수를 바라느냐며 반문 했다. 다만 전란을 겪는 통에 물자가 극도로 고갈되어 관공(館供)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리고 관공의 결손 문제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유사의 잘못이 있겠지만, 그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책무는 본인에게 있다는 말을 전하였다.15)
1600년(선조 33) 가을 조선에 잔류한 명군의 본진이 철수했다. 명군이 본국으로 철수된 사정을 살펴보면 명나라 변경 파주(播州)에서 일어난 양응룡(楊應龍)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를 동원시켜야 하는 본국의 사정이 주효했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에서의 비용 증가와 관공 결핍도 주둔 명군의 철수를 촉발시키는 주요 요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가유약은 조선에 체류할 때 순국 명군들을 기리는 사당 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가유약은 선 조를 만나는 자리에서 지난번 울산 도산성전투, 순천왜성전투, 명장 등자룡(鄧子龍)이 참전했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많은 장사는 모두 충성을 바쳐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한 자들이니 조선에서 해당 장소에 사우를 건립하여 치제하는 것이 마땅한데 전란이 끝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 건립 된 사당이 없다고 했다. 이에 선조는 도산 등처에 이미 제단을 설치해 치제하였으나 사당은 세울 겨를이 없었다며 그간 사정을 토로했다. 이어서 명군이 조선을 위해 수만 리 이역에서 싸우다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 어찌 측은한 마음이 없겠느냐며 사당 건립을 약조했다.16)
가유약이 건립을 추진한 순직 명군 사당은 민충단(愍忠壇)의 일종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들이 여러 전투에 나섰다가 돌아가신 자들이 아주 많았다. 대규모 전투가 펼쳐졌던 전장 근처에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전사한 명군들의 혼을 기리는 치제를 행했다. 1593년(선조 26)에 명 조정은 평양, 개성, 백제, 왕경(한양)에서 전사한 명군을 위해 제단을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제물을 마련하여 관 원이 나가 치제하는 방침을 세웠다.17) 곧이어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은 즉시 한성판윤, 경기감 사 등에게 전장 근처에 ‘칙사민충단(勅使愍忠壇)’이라고 쓴 나무를 세워 치제하도록 했다.18) 이때 한양 홍제원에 민충단이 세워졌다. 1595년(선조 28)에 명 조정의 명을 받은 영병유격(領兵遊擊) 진운홍(陳雲鴻)이 한양 홍제원 민충단에 나가 치제했다.19) 이후 조선 조정은 명군이 많이 전사한 안강, 울산 도산성 등처에 제단을 만들고 치제했다.
전란이 끝난 직후에 가유약의 청원처럼 조선 조정은 또 하나의 순직 명군 사당을 건립하지 않았으나, 홍제원 민충단에 대해 부정기적이나마 치제가 계속 행해졌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20) 1760년(영조 36)에 선무사(宣武祠) 뜰의 동편에 조그만 사당을 지어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로 칭 하고 홍제원 민충단의 위패를 이봉하고 치제를 계속 이어갔다.21) 그리고 가유약이 선조에게 언급 한 노량해전의 등자룡은 이순신과 함께 대규모 일본 수군을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던 명 부총병이다. 반면 조선 문헌 가운데 가유약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기술해놓은 기록이 있다. 하나는 조선 사관 의 논평이다. “가유약은 사람됨이 음험하고 거만하며 문예에만 재능이 있다.”22) 또 하나는 《임진 필록》의 논평이다. “가유약은 시문을 잘 짓고 글씨에 뛰어났고, 조선 조정에 특별히 간섭하거나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통솔한 수하들이 모두 오합지졸이라 도처에서 작폐를 일으켰는데, 주사(가유약)가 단속시키지 못했다.23)
조선 측 문헌에서 논한 가유약의 인물됨은 다소 지나친 면이 있다. 가유약이 조선 조정과 선후책 을 논할 때 약간의 마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가유약은 자신이 소속된 명군의 입장에서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내는 과정에 서 조선 조정의 입장과 반한 모습을 보였다. 수하들이 규율이 없고 무질서한 행패를 일으킨 것은 비록 수하 관리를 잘못한 책임은 있지만,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리고 가유약은 예의를 갖춘 문사 였다. 선조와 처음 만났을 때 선조가 보내준 예물을 두 차례나 정중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24) 가 유약은 명 조정의 신하답게 자기 단속을 충실히 행하였다.
3. 가유약(賈維鑰)의 문학 고찰
가유약은 한 명의 뛰어난 문재를 갖춘 전통 문사였다. 경적(經籍)을 섭렵하여 다양한 지식을 갖 추었다. 시를 잘 지었고, 특히 악부와 산곡(散曲)에 뛰어났다.25) 글씨에도 명성이 있었다.26) 가유약 이 조정에 있을 때 참언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준화에 돌아와서 산수를 돌아다니며 자연이 가져다주는 멋진 풍광과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면서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지었다. 이 때 그의 명성이 양소백(梁少白; 辰魚), 당육여(唐六如; 唐寅)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세평이 있다. 문집으로 《청원사고(靑原詞稿)》, 《영물근체(詠物近體)》, 《쌍청집(雙淸集)》, 《전석기전(前席記傳)》 등을 남겼으나,27) 아쉽게도 오늘날 전해오지 않는다.
가유약이 준화에 있을 때 주나라 시절 무종자(無終子) 가보(嘉父)가 신선술을 수련했다고 알려진 무종동(無終洞)을 유람한 뒤 신선 세상을 꿈꾸며 <무종동(無終洞)> 시를 지었다. 《[강희]준화주지》 권12 <예문(藝文)>에 수록된 가유약의 <무종동>을 감상해 본다.
蕭蕭古洞倚巉岏 솔솔 부는 옛 동굴이 험준하고 鷄犬高飛鼎竈寒 닭 개 높이 날고 솥 부엌 차갑도다 何日歸來丁今鶴 언제 정학(丁鶴)이 돌아와 相逢定吃紫霞丹 서로 만나 자하단(紫霞丹) 먹세
무종동은 준화 남동쪽 37㎞ 정도 떨어진 무종산(無終山; 철창촌[鐵廠村] 서쪽)에 소재한다. 동굴 입구는 3척이고, 깊이는 20여 걸음이다. 동굴 속에 크고 작은 구멍 15개기 뚫려 있어 바람과 햇 빛이 드나든다. 1575년(만력 3)에 당문찬(唐文燦)이 정비하였다.28) 당문찬의 자는 약소(若素)이고, 호는 감강(鑑江)이다. 공부우형랑중(工部虞衡郞中) 때 야철을 담당했다. 동굴 옆에는 당문찬의 <중 수철창무종동기(重修鐵廠無終洞記)>가 세워져 있다. 무종동은 원래 용천동(湧泉洞)이라고 불렀고, 척계광(戚繼光)이 무종동으로 바꾸었다. 이로부터 많은 사람이 유람하는 장소가 되었다.
상기 시에는 시인 가유약이 신선을 동경하는 마음이 잘 토로되어 있다. 시의 전반부에는 동굴의 자연 풍광과 모습을 읊었다. 시인은 주나라 가부의 신선술을 배우고 하는 마음으로 동굴을 찾아 나섰지만, 동굴이 산세가 깎아지른 듯 험준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찾아가기가 몹시 힘들었다. 동 굴 속에는 하늘과 통해 있는 구멍이 나 있어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선계에서 사는 닭과 개들이 드 나들고, 신선이 연단을 만드는 솥과 부엌은 차가웠다. 후반부에는 신선 고사와 연계해서 신선술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한나라 때 요동의 정령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 들어가 신선술을 배운 뒤에 학으로 변화하여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는 고사처럼 자신도 무종자 가부와 만나 노 니면서 예로부터 선계에서 만든 비방인 자하단을 먹고선 신선이 되고 싶었다.
가유약이 준화에 머물고 있을 때 창작한 또 한 편의 시편이 전해온다. 《[건륭]직례준화주지(直隷 遵化州志)》 권12 <예문(藝文)> 중 <보주산조망(寶珠山眺望)>에서:
寶珠佳氣興雲浮 보주(寶珠)의 서기가 뜬구름 위로 일어나고 玉闕新開據上游 새로 연 옥궐이 상류에 웅거하네
突兀孤峯穿地起 우뚝 솟은 외로운 봉우리가 땅 뚫고 일어나 縈迴曲水抱山流 굽이굽이 휘도는 물이 산 안고 흐르니 已知振策凌霄漢 알았도다 지팡이 떨쳐 하늘 찌를 것을 不用乘槎犯斗牛 필요없다 떼배로 두우성(斗牛星) 범할 것을 落日蕭蕭陵谷暗 지는 해가 쓸쓸하고 산과 골이 어두침침 諸天花雨下滄洲 뭇 하늘 꽃비가 창주(滄洲)에 내리구나
이 시편은 《[강희]순화주지》나 《[광서]순화통지》에 보이지 않는다. 하루는 가유약이 준화 동남쪽 16리에 떨어진 보주산(寶珠山)에 유력했다. 보주산 정상에 상제를 모시는 옥황묘가 세워져 있었 다.29) 전반부에서 도교의 성산인 보주산의 기이한 모습을 담았다. 보주산에서 나온 상서로운 기운 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고, 외로운 봉우리가 땅을 뚫고 우뚝 솟아 있으며, 물이 굽이굽이 산을 돌 아 아래로 흐르고 있다. 보주산 정상부에는 시인이 꿈꾸던 천상의 세계, 즉 상제가 거주하는 자미 궁(紫微宮)이 있었다. 후반부에서 시인의 재기와 하산 모습 담았다. 시인이 보주산에서 휘두른 붓 과 시편은 이미 천상의 세계를 찌르고 북두성과 견우성을 휘졌었다. 보주산에서 유력을 마친 시인 이 산 아래로 내려가니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때 시인의 뛰어난 시편 에 흡족한 상제는 그 보답으로 시인이 내려가는 길에 꽃비를 내리게 해주었다.
가유약이 조선에서 머물고 있을 때 여유가 있으면 뛰어난 조선 문사들과 시를 짓거나 학문 논하 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가유약이 의주와 한양을 오가는 길목인 황해도 서흥관(瑞興館)에 유숙할 때 <숙서흥관운(宿瑞興館韻)>을 지었다.
凍雲初散日西斜 언 구름 흩어지니 해가 서쪽으로 기웃기웃 立馬荒城客意賖 황성(荒城)에 말 세우고 객 마음이 느릿느릿 芳草平原多鳥道 평원에 향기로운 풀과 좁은 길이 많고 低烟破壁幾人家 헤진 벽에 낮은 연기 나는 가구는 몇이냐 轉開山館他鄕酒 산관(山館)에서 타향의 술동이 열어놓고는 遙醉春風故國花 봄바람에 멀리 고국의 꽃에 취하였네 試看少微今夜色 오늘 밤에 소미성(少微星)의 광채를 살펴보니 淸光萬里照天涯 만 리의 맑은 빛이 하늘가를 비추었네
이 시는 《오산집(五山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가유약은 이 시에서 자신의 빼어난 시재를 마음 껏 뽐냈다. 첫 단락에서는 시속의 시공을 그렸다. 이른 봄날에 전란으로 헤어진 성의 객사에 말을 세워놓고 보니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시인의 마음 또한 느릿느릿 여유가 있는 모습을 담아놓았다. 다음 단락에서는 주변에 아름다운 풍광을 그렸다. 객사에서 주변을 돌아보니 그림 같 은 멋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들판에는 향내 나는 꽃들이 많이 피어 있고, 그 사이에 겨우 새 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의 좁은 길이 이리저리 나 있었다. 몇몇 인가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연 기가 땅으로 깔려 헤진 담벼락 사이를 지나가며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이어진 단락에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생각을 담아놓았다. 이국땅의 객사에서 잘 빗은 술동이를 열어젖히고 만 리나 멀리 떨 어진 고향의 꽃향내가 봄바람을 타고 날아 들어오니 이내 취해버렸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시인은 뛰어난 시재를 마음껏 드러냈다. 저 멀리 하늘 가운데 맑은 빛을 발산하는 소미성(少微星), 일명 처사성(處士星)을 살펴보고는 먼 이국땅에까지 반짝거리는 자신의 시재를 과시했다.
조선 조정은 가유약의 시재에 맞서기 위해 특별히 시재로 널리 알려진 차천로(車天輅)를 접반관 으로 삼았다. 당시 차천로의 시는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岦)의 산문과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 絶)이라고 불리었다. 이날 차천로는 가유약의 시를 차운해서 <차가랑중숙서흥관운(次賈郞中宿瑞興 館韻)>을 지었다.30) 또 차천로는 문장 또한 수려하여 선조 연간에 대명과 대일본의 외교문서 대부분 을 담당했다. 한번은 접반사 한술(韓述)을 대신해서 가유약에게 보낸 계(啓)를 지어주기도 했다.31) 가유약은 조선 문단에서 천재 문사로 알려진 허균(許筠)과 학문 교류를 펼쳤다. 허균은 부친 허엽(許曄), 맏형 허성(許筬), 중형 허봉(許篈),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으로 이루어진 명문 문벌의 자제이다. 한 번은 허균이 가유약의 시를 차운한 적이 있다. 미국 버클리대학도서관에 명 유격 남 방위(藍芳威)가 정유재란 때 들어와 많은 한국 한시를 수집하여 선별한 《조선시선전집(朝鮮詩選全 集)》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허균이 가유약의 <희증오자어(戱贈吳子魚)>를 차운해서 지은 <채호 영(彩毫詠), 차가사마희증오자어(次賈司馬戱贈吳子魚)>가 수록되어 있다. 아쉽게도 가유약이 지었 던 원 시편은 전해오지 않는다.
오명제(吳明濟)는 절강 회계(會稽) 출신의 문사이다. 1598년(선조 31)에 찬획주사(贊畫主事) 서 중소(徐中素)의 막료가 되어 조선에 들어와 한양의 허균 집에 거처하며 많은 한국 한시를 수집했 다. 곧이어 서중소가 친상을 당하여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다. 1599년(선조 32)에 또 한 차례 조선 으로 들어와 거듭 한국 한시를 수집하여 《조선시선(朝鮮詩選)》을 편찬했다. 중국 국가도서관에는 오명제의 《조선시선》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자에 계문(薊門) 가사마(賈司馬), 즉 가유약이 한초명 (韓初命), 왕세종(汪世鍾)과 더불어 《조선시선》을 열독하고 교감했다는 기록이 보인다.32) 허균은 <조선시선후서(朝鮮詩選後序)>를 지었다.
한 번은 허균은 가유약을 통해 해외 정보를 얻고는 새로운 희망을 품었던 적이 있다. 즉, 가유약 이 보여준 《이문광독(夷門廣牘)》 중 고공(高拱)이 쓴 《병탑유언(病榻遺言)》을 통해 중국에 불사이 군(不事二君)의 고려 충신 김주(金澍) 사적, 조선국의 종계 사적, 기순(祁順)과 서거정(徐居正) 수창 시 고사 등 우리나라 사적이 알려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33)
또 한 번은 허균이 명나라가 운영하는 빈공과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가유약은 안남(베트남) 과 유구가 모두 빈공과에 응시한다는 사실과 명나라 때 진유(陳儒), 완악(玩鶚), 손응오(孫應鰲)가 급제하여 고위직을 역임했고, 현재에도 거인(擧人)・공사(貢士) 출신으로 주현의 관리가 된 자가 5명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허균은 이 말을 듣고 나서는 힘이 솟구치는 기운을 받았다고 했다.34)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허균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조선 땅이 좁다고 여기고 있었는 데, 가유약을 통해 해외 정보를 얻고 나서는 새로운 세상으로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1599년(선조 32) 가을에 경리 만세덕은 대장군 이승훈(李承勛) 이하 문무 장리들을 거느리고 부산 자성대에 올라 대한해협을 바라보며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사적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가유약 은 명군이 전승을 거두었던 사적을 기리는 <부산평왜비명(釜山平倭碑銘)>을 지었다. <부산평왜비 명>은 일명 <부산장성비명(釜山子城碑銘)>, <만세덕기공비(萬世德紀功碑)>, <만장군기공비(萬將軍 記功碑)>, <만세덕비(萬世德碑)>라고 한다.
동년 10월 1일에 접반사 한술은 가유약이 지은 <부산평왜비명>의 초고본을 조정에 알렸다.35) 얼 마 후 부산 자성대에 <부산평왜비명>이 세워졌다. 현재 전해오는 가유약이 지은 <부산평왜비명> 은 두 종의 판본이 있다. 하나는 《선조실록》(선조 32년 10월 1일조)에 수록된 가유약의 초고본이 고, 다른 하나는 《동래부지(東萊府誌)》, 《충렬사지(忠烈祠志)》, 《유회당선생집(有懷堂先生集)》(권7 <속부산자성절비기[續釜山子城折碑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외집 권63 <오륙도(五六島)>), 《석재고(碩齋稿)》(권9 <오륙도(五六島)>) 등에 수록된 가유약의 정본, 즉 다시 수정한 정본이다. 아래 에 《유회당선생집》 권7 <속부산자성절비기>에 수록된 가유약의 정본 <부산평왜비명>을 적어본다.
維皇明萬曆歲在屠維淵獻之次八月上浣, 經理大中丞萬公世德, 受命專征, 至于三韓, 廓淸倭氛, 保 定屬藩, 乘秋南獮, 放于東海, 遂偕大將軍李公承勛, 率文武將吏, 登釜山之顚而喟然歎曰: 於鑠哉! 聖仁神武, 丕揚流鬯, 一至于斯乎. 乃授簡外史氏前兵部職方司郞中薊門賈維鑰, 叙其事而銘之. 曰: 盖維朝鮮, 內附稱藩, 與國同久. 倭奴不道, 螫其山川, 宗廟鞠爲丘墟, 旄倪轉于溝壑, 箕封板蕩, 狀 極慘楚. 天子閔而援之, 王師渡江, 平壤克捷. 關酋愳禍, 狡爲革面, 乞受名封. 朝廷推誠柔遠, 是信是 予. 顧使節甫旋, 盟寒口舌. 是奚異夫有苗之逆虞, 鬼方之負殷, 玁狁之猾周者哉?
天怒震疊, 義在必討, 以大司馬邢公玠, 行総督諸軍事, 擢參政揚公鎬, 爲御史中丞經理朝鮮. 亡何 以行間事齟齬去, 而萬公自天津移鎭焉, 則寵命郅隆, 肩任益鉅矣. 先是朝廷鄭重厥役, 頒四大將軍印 綬, 於是麻將軍貴,董將軍一元, 以薊遼雲谷步騎之銳至, 劉將軍綎,陳將軍璘, 以吳越閩蜀舟陸之 䧺至. 簡詰兵戎則左右道參政王士琦,參議梁祖齡,副使杜潛, 而督餉則民部郞董漢儒有專責焉. 至 于隨職宣猷則運同吳良壐等, 分陴戮力則副総兵解生等, 各有司存, 共襄機務. 惟是御史陳公効, 躬膺 特簡, 以繡斧按治弗戒.
吁嗟乎! 七萃賅百職備, 如雲如林, 太原之戍, 細柳之屯, 庸詎肅於斯耶? 於是剋日誓師, 四路競進, 擊斗則空谷飜雷, 揚帆則洪濤浴日, 搗吭中窽, 排縋斯竆, 奮螳臂者授首膏原, 悲狐丘者扶傷夜遁, 海截山殲, 京觀岳峙, 除殘拓境, 水國風淸. 上以紓九重宵旰之懷, 下以洩八道神人之憤, 黍離不作, 鴻鴈興謠, 猗歟至矣. 國家德濡竆壤, 而威加日出之域, 考鏡三五, 曷以加焉. 因封山刊石勒銘, 以昭鴻 烈, 以示無竆.
其辭曰: 維皇仁覆, 怙遐荒兮, 蠢玆凶梟, 侵侯疆兮, 爰整六師, 以遏徂征兮, 執禽獲醜, 孰逆顔行兮, 取殘植弱, 靜海邦兮, 讋遠柔邇, 風四方兮, 瞻彼巉嵓兮, 天威有赫, 酌彼溟渤兮, 帝德罔極, 拜手題石 兮, 揮昭鴻烈, 萬歲千秋兮, 永奠王國.
[황명 만력 기해년(1599) 8월 상순에 경리(經理) 대중승(大中丞) 만세덕(萬世德) 공이 정벌을 전담하는 황명을 받들어 삼한에 이르러 왜의 기운을 싹 쓸어버리고 번국을 보장시켰다. 가을에 南征하여 동해에 도달하였다. 대장군 이승훈(李承勛) 공과 더불어 문무장리를 거느리고 부산의 산마루에 올라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아 빛났도다. 성스로운 인(仁)과 신령스러운 무(武)로서 향 내가 사방에 날려 여기에까지 이르렀도다. 이에 외사씨(外史氏) 전 병부직방사랑중(兵部職方司 郞中) 계문(薊門) 가유약(賈維鑰)에게 그 일을 서술하여 새기도록 했다. 말하기를:
대개 조선은 내부(來附)하여 번국이라 칭하며 나라와 더불어 오래 같이했도다. 왜노가 무도하 여 산천에 독을 퍼뜨리고 종묘를 폐허로 만들고 노인네와 아이들을 골짜기에 몰아갔다. 箕子의 봉토가 뒤흔들려 그 형세가 심히 참혹하였도다. 천자가 민망하게 여겨 지원에 나서게 하니 왕 사가 압록강을 건너고 평양을 대첩을 거두었다. 관백(關白; 豐臣秀吉)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 여 교활하게 얼굴을 바꾸어 봉작(封爵)을 받기를 구걸하였다. 조정은 그 정성을 미루어 먼 곳을 회유하고자 이를 믿고 이루어주었다. 사절이 돌아오자마자 맹약을 저버리니 이것이 어찌 묘족 (苗族)이 유우씨(有虞氏; 순임금)를 반역하고, 귀방(鬼方)이 은나라를 배반하며, 험윤(玁狁)이 주 나라를 어지럽게 한 것과 다르겠는가?
천자가 크게 진노하여 반드시 정벌해야 한다는 뜻을 세우고 대사마 형개(邢玠) 공이 총독제 군사(総督諸軍事)로 삼고, 참정 양호(揚[楊의 오기]鎬) 공을 발탁하여 어사중승경리조선(御史中 丞經理朝鮮)으로 삼았다. 얼마 있지 않아 군중의 일을 그르게 하여 떠나버렸다. 만공이 천진에 서 진을 옮겨왔는데, 총애하는 명이 크고 융성하며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다. 이보다 앞서 조정 이 이번 군역(軍役)을 무겁게 여기 대장군 4명에게 인수(印綬)를 내리셨다. 장군 마귀(麻貴), 장 군 동일원(董一元)이 계(薊)・료(遼)・운(雲)・곡(谷)의 정예 보병과 기병이 거느리고 들어왔고, 장군 유정(劉綎), 장군 진린(陳璘)이 오(吳)・월(越)・민(閩)・촉(蜀)의 뛰어난 수군과 육군을 거 느리고 들어왔다. 군사를 단속하는 것은 좌우도참정(左右道參政) 왕사기(王士琦),참의(參議) 양 조령(梁祖齡),부사(副使) 두잠(杜潛)이 맡았고, 군량 감독은 민부랑(民部郞) 동한유(董漢儒)가 전적으로 책임졌으며, 직무를 수행하고 계책을 세우는 것은 운동(運同) 오량쇄(吳良壐) 등, 진을 나누어 서로 힘을 다하는 것은 부총병(副総兵) 해생(解生) 등이 맡겨 각각 유사를 두어 기무를 함께 돕도록 했다. 오로지 어사(御史) 진효(陳效) 공이 몸소 특명을 받아 수의(繡衣)와 부월(斧鉞)로 따르지 않은 자를 다스리게 했다.
아아! 군사가 정비되고 모든 직책이 갖추어져 구름과 같고 숲처럼 빽빽하니 태원(太原)의 변 경, 세류(細柳)의 둔영인들 어찌 이보다 엄숙하오리오? 이에 날을 정하여 군사들과 맹세하고 사 로(四路)로 나누어 다투어 진격하였도다. 징을 치니 빈 골짜기에 우레 치는 듯하고, 돛을 올리니 떠오른 해가 큰 파도에 비쳤도다. 대항하는 자를 찍어 죽이고, 매달린 자를 없애 버렸도다. 당 랑(螳螂)의 팔뚝에 휘두른 자는 우리 땅에 목숨을 바치고, 호구(狐丘)를 그러워하는 자는 상처를 부여잡고 밤을 틈타 도망쳤도다. 바다에서 차단하고 산에서 섬멸하니 쌓인 시체가 산더미 같 고, 잔악한 자를 없애버려 지경을 회복하니 수국(水國)의 기운이 맑아졌다. 위로는 구중궁궐에 서 황제의 마음을 펴게 하고 아래로는 팔도 신령과 백성의 분노를 풀어주었도다. 서리(黍離)의 탄식이 일어나지 않고 홍안(鴻雁)의 노래가 불리니 아아 아름답고도 지극하도다. 국가의 덕화가 먼 지경까지 적시게 하고, 위엄이 해가 뜨는 지역까지 떨치게 하니 삼황오제를 고찰해도 이보 다 더할 수 있으리오? 산을 봉하고 돌을 깎아 명을 새겨 큰 공적을 빛나게 하여 무궁한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
그 가사에:
황제의 인자함이 덮었도다, 의지하는 먼 나라까지 어리석은 흉악한 무리가 제후 나라 침범하였도다 천자 군사를 정돈하여 정벌하고 막으니
추악한 무리 사로잡는데 누가 선봉서지 않으리오 쇠약한 자들 보살피니 해동이 고요하고
멀리 두려움, 가까이 유화되어 사방에 소문났네 저 높고 험한 바위 보라 천자의 위엄이 혁혁하고 저 큰 바닷물 따르어 황제의 덕이 끝없도다 손 모아 절하고 비석에 써서 큰 공렬 밝게 드날리니 천추만세여, 나라가 영원히 안정되었도다]
<부산평왜비명>은 정유재란을 이끈 명군의 전승비이다. 비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정유재란 과 선후책으로 들어온 명 문무장리로 구성되어 있다. 형개는 군문, 양호、만세득은 경리, 이승훈、 마귀、동일원、유정、진린은 대장군, 왕사기、양조령、두잠은 감군, 동한유는 군량, 오양새는 기획, 해 생 등은 장수, 진효는 감찰을 맡아 활동했다.
비문에서 평양성을 탈환했던 전첩 문구가 들어가 있지만, 임진왜란 초기 평양성 탈환을 이끈 제독 이여송(李如松)이나 경략 송응창(宋應昌)의 이름은 빠져 있다. 정유재란 때 경리 양호가 나서 조 선 출전에 나섰지만 이내 일을 그르게 하여 본국으로 되돌아갔고, 그 자리에 본 비석을 세운 주체 인물인 경리 만세덕이 나서 전승을 거두었다며 공적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다.
비문 곳곳에는 명나라가 전승을 거두었다는 말이 들어가 있다. 명 신종제는 오랫동안 내국처럼 여긴 조선이 무도하고 흉악한 일본에 의해 군사 침략을 당하여 위기에 빠지자 크게 진노하여 특출 한 인물들을 선발하여 군사 지원에 나서도록 명을 내렸다. 황제의 특명을 받은 뭇 신하들이 군사 들을 거느리고 가서 서로 협동하고 계략과 힘을 다해 왜적의 나쁜 기운을 동해 바깥으로 싹 쓸어 버리고 해동에 맑은 기운을 되찾았다.
<부산평왜비명>이 세워진 장소는 부산진성 옆에 자성을 쌓았던 자성대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이 부산진을 보호하기 위해 자성대에 성을 새로 쌓았다. 일부 문헌에서 <부산평왜비명>이 부산 앞 바다에 소재한 오륙도의 제3봉에 세웠다고 하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36)
1683년(숙종 9)에 삼도수군절도사 민섬(閔暹)이 임진왜란 때 만세덕이 일본군을 정벌한 비석, 즉 <부산평왜비명>의 비면이 마멸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비면을 갈아 비문을 다시 새기고, 또 비석 뒷면에 그간 과정을 적어놓았다.37) 1709년(숙종 35)에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부산평 왜비명>이 부러진 채 풀밭에 누워져 있는 것을 보고 동을 녹여 부러진 부분을 잇고, 또 석주를 세 우고 대들보를 얹어져 비석을 보호하였다.38)
1834년(순조 34)에 화사 이시눌(李時訥)이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펼쳐진 전쟁 장면을 그린 소위 <임진왜란도(壬辰倭亂圖)>가 있다. 원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왜인군막(倭人軍幕)’이라 쓴 군막 안에 ‘자성대(子城臺)’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또 군막 앞에 ‘萬公所勒碑’이 세워져 있고, 그 앞 에 ‘만공단(萬公壇)’과 ‘민통사섬추립비(閔統使暹追立碑)’가 보인다. 그림 속의 ‘만공소륵비(萬公所 勒碑)’는 <부산평왜비명>을 지칭한다. 이후 <부산평왜비명>은 실전되었다.
4. 결론
한국 소주 가씨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참전한 명나라 인사를 해동조로 삼은 대표적인 집안 중의 하나이다. 충남 태안에 집성촌을 두고 있다. 소주 가씨의 해동조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참전한 문 관 출신의 가유약이다. 가유약의 원 고향은 하북 준화이다. 각종 준화 지방지에 모두 가유약을 준 화 출신으로 적고 있고, 가유약 자신도 준화의 상급지 계문(薊門) 사람이라고 적었다. 가유약의 부 친은 병부우시랑 가응원이다.
가유약은 1582년(만력 10)에 순천부 향시, 1589년(만력 17)에 진사에 급제했다. 1593년(만력 21)에 흠차사험군공병부무선청리사주사(欽差査驗軍功兵部武選淸吏司主事)가 되어 명군 감찰과 군공 반포 건으로 조선에 들어왔다가 이내 귀국했다. 1596년(만력 24)에 병부직방사랑중(兵部職 方司郞中)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종제가 요구한 섭계고 사건을 지연 처리함에 저촉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9년(만력 27)에 원임 병부직방사낭중이 되어 경리 만세 덕 아래에서 선후책을 강구하고자 다시 한번 조선에 들어왔다.
가유약은 뛰어난 문재를 가진 전통 문사였다. 경적을 섭렵하여 다양한 지식을 갖추었고, 글씨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특히 악부, 산곡 등 여러 시체에도 능했다. 조선 사관과 실록에서도 가유약의 문재가 빼어나다고 평할 정도였다. 가유약은 《청원사고(靑原詞稿)》, 《영물근체(詠物近體)》, 《쌍청 집(雙淸集)》, 《전석기전(前席記傳)》 등 여러 문집을 남겼으나 오늘날 전해오는 작품은 많지 않다. 다만 <무종동(無終洞)>, <보주산조망(寶珠山眺望)>, <숙서흥관운(宿瑞興館韻)>, <부산평왜비명(釜 山平倭碑銘)>에서 가유약의 빼어난 문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가유약이 조선에 머물고 있을 때 당대 최고의 문사로 알려진 차천로, 허균 등과 학문 교류가 있었으며, 특히 허균에게 해외에서 자신의 문재를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그리고 오명제가 편찬한 《조선시선》의 교정 작업 에 참여하여 수준 높은 한국 한시를 중국 문단에 소개하는데 일조했다.
끝으로 우리는 가유약의 사적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은지를 적어본다. 역사적 인물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인물의 실체를 역사 기록에 따라 분명하고 정확하게 밝히는 작업이다. 그래야만 해당 인물이 지닌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명확하게 알릴 수 있다. 가유약은 임진왜란 때 위난에 빠진 조선의 국운을 도와준 인사였다. 이 모든 것이 역사 기록에 기술되어 있다.
또 가유약의 사적에 대해 한중 문헌 사이에 일부 기록 차이가 보인다. 물론 기록 차이가 보이는 부분에 대해 우리는 이것 모두가 잘못 기술되었다고 치부할 필요는 없다. 소주 가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구전이 설령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 또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후대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집안 구전도 역사 변천 과정을 알아보는데 나름대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가유약의 행적과 문학에 대해 현 단계에서 사료 부족으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 많이 남아 있다. 앞으로 새로운 사료가 나와 좀 더 정 확한 실체가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賈行健撰, 《石湖集》, 국립중앙도서관장 고종7(1870)목활자본.
蘇州賈氏宗親會編, 《[기해]蘇州賈氏大同譜》, 국립중앙도서관장 1899년(광무 3)인본. 蘇州賈氏宗親會編, 《[무자]蘇州賈氏大同譜》, 韓國族譜編纂委員會, 서울, 2008.
鄭僑生續修, 《[강희]遵化州志》(《中國地方志集成, 河北府縣志輯》 책22), [上海]上海書店・[成都]巴 蜀書社・[南京]江蘇古籍出版社, 2006.
何崧泰・史朴纂修, 《[광서]遵化通志》(《中國地方志集成, 河北府縣志輯》 책22), [上海]上海書店・[成 都]巴蜀書社・[南京]江蘇古籍出版社, 2006.

조선후기 소주가씨 문중의 역사와 주요 인물
- 이 근 호(충남대학교 교수)
1. 머리말
16세기 후반~17세기 조선을 둘러싼 국제 환경이 녹록지 않았다. 그 결과 개국 이후 200여 년간 의 안정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두 차례 호란, 그리고 명(明)·청(淸)의 교체는 조선으로 서는 ‘충격적’인 역사적 경험이었다. 이 같은 역사적 변동기에 국내적으로는 정치·사회적인 변화 를 수반하였고, 다수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경험하게 되었다. 1)
특히 임진왜란은 국제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군사적 이유 등으로 디아스포라가 실행되기 에 충분한 조건을 갖는다. 이런 때문인지 선행 연구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명군(明軍) 가 운데 약 20여개 이상의 성씨가 조선에 정착한 것으로 조사되었다.2) 물론 이밖에도 다수의 성씨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임진왜란은 주변 지역으로부터의 디아스 포라를 촉진하는 한 계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겠다.
한편 임진왜란 때 참전하였다가 조선에 정착한 명군의 후예들은 조선 후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호출되었다. 주로 조선 후기를 지배했던 ‘중화주의(中華主義)’ 의 산물이었다. 임진왜란과 두 차례 호란, 그리고 명·청의 교체는 조선 후기 사회에 중화주의를 뿌 리 깊게 자리를 잡게 하였다. 중화주의는 논자에 따라서는 여러 각도로 해석되거나 평가되고는 있 지만, 여기서 필자가 이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여유는 없다. 17세기 이후 사회적으로 중화주의가 팽배했음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결국 임진왜란 참전한 명군이나, 명·청 교체 직후 디아스포라를 실 행한 성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되 었다는 정도를 지적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이 같은 관점에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정착한 소주가씨(蘇州賈氏)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조선에 정착한 소주가씨에 대해서는 주로 가문에서 간행한 자료3)를 통해 서 소개되었고, 이밖에도 태안반도의 촌락에 대한 검토 과정에서 소주가씨를 언급한 연구가 있 다.4) 학문적 검토가 거의 진행된 바가 없다고 하겠다. 아래에서는 선행 연구를 참고하면서 조선 후기 소주가씨의 본관 유래를 비롯해 그들이 태안에 정착하는 내력을 살펴보고, 이어서 후손들의 계파 형성 및 거주지 변동과 관직 진출 인물 등에 대해서 추적하고자 한다.
2. 본관의 유래와 태안 정착
태안에 정착한 가씨(賈氏)는 본관을 소주(蘇州)로 한다. 가씨의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 가 전한다. 먼저는 중국의 은(殷)·상(商) 때 산서성 가향(賈鄕) 일대에 있었던 가국(賈國)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가국은 주나라 무왕이 상(商)을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없어졌거나 주나라 무왕에게 신복(臣服)한 국가인데, BC 1046년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망시킨 뒤 그 나라의 귀족 과 자(子) 등이 국명에 따라 성씨를 가씨라고 하였다는 견해이다. 다음은 상(商)·주(周) 때 관직 중 하나인 가정(賈正)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가정은 주나라 때에는 가사(賈師), 노나라 때는 가정 (賈正)으로 불렸는데, 주로 도성의 상업 활동을 관리, 감독하여 물가를 조절하고 시장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던 관직이다. 이들 가사 혹은 가정의 후예들이 선조의 관직에 따라 성씨를 가(賈) 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주나라 성왕의 동생인 당숙우(唐叔虞)의 아들 공명(公明)과 후예들을 옛 당지(唐地: 오늘날의 산서성 익성현)에 가백(賈伯)으로 봉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견해 이다.5)
그리고 가씨는 다양한 본관으로 분적(分籍)되었음이 확인된다. 중국의 가씨는 대략 50여개 내외 로 분적된 것으로 확인되며, 분적 사실은 족보 편찬 현황을 통해서 확인된다. 가씨의 본관별 족보 편찬 현황은 다음과 같다.
위 표를 보면, 가씨는 해녕가씨(海寧賈氏), 진정가씨(真定賈氏), 양천가씨(洋川賈氏)를 비롯해 산 음가씨(山陰賈氏), 개사가씨(開沙賈氏)까지 모두 49개 성관에서 족보가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표-1>에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소주가씨(蘇州賈氏)가 확인되지 않아 의문이다. 지금 까지 소주가씨 집안에서는 가씨의 기원을 가공명(賈公明)이 봉해진 가국(賈國)에서 기원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가국은 중국 낙양(洛陽)으로부터 소주(蘇州)에 이르는 지역이고, 여기서 가씨가 기원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7) 가국의 국도(國都)는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 양분현(襄 汾縣) 일대인데, 족보에서 굳이 소주를 언급하는 것은 본관인 소주가 중국의 동일 지명에서 유래 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소주가씨대동보》에서 가유약(賈維鑰)을 중시조(中始祖) 로 표현하고 있는 것 역시 소주가씨가 중국 가씨에서 유래한 것임을 명시한 부분이다.
소주가씨는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의 일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가유약(賈維鑰)을 시조로 한 다. 가유약의 자는 무경(無扃)이고 호는 지백(知白)이며, 명의 직례(直隷)인 순천부(順天府) 준화현 (遵化縣) 출신이다. 1583년(만력 11, 선조 16)에 진사가 되었다. 가유약은 주사(主事)의 직함을 띠 고8) 1593년(선조 26) 명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조선에 나와 있던 송응창(宋應昌)의 경략아문(經略 衙門)에 가서 효유하였다. 가유약의 주 업무는 명나라 군사의 군공을 조사하고 군대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칙사를 그대로 보낼 수 없다며 안주(安州)나 정주(定州)에서 전위연(餞 慰宴)을 거행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9)
가유약은 이후 1599년(선조 32) 윤4월에 낭중(郎中)의 직함을 띠고 조선에 파견되었다.10) 경리 (經理) 만세덕(萬世德)을 보좌하기 위한 것이었다.11) 윤4월 7일과 윤4월 9일,12) 윤4월 11일,13) 8월 14일,14) 8월 15일,15)10월 5일,16) 10월 7일17) 등에 국왕과의 만남을 가지기도 하였다. 윤4월 11일 만남에서는 다음과 같이 병농분리(兵農分離)라는 군비(軍備) 강화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귀국의 문관 중에 지모 있는 선비가 많으니 반드시 남김없이 계책을 세우리라 봅니다. 귀국 이 잔파되기는 했어도 팔도의 군병을 모으면 수만 명은 얻을 수 있으니 험지와 요새지에 웅거 하여 군대 훈련과 둔전, 그리고 농사를 권장하는 등의 일을 차례로 거행한다면 뒤처리할 계책이 없다고 걱정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천조는 군대와 농사를 둘로 분리하여 각기 본업이 있는 데, 제가 들으니 귀국의 전사들은 다 스스로 군량을 소지하고 3개월 만에 교대한다고 하였습니 다. 이미 전쟁에 나가게 하면서 또 스스로 군량까지 짊어지고 가게 하는 것은 이른바 ‘천리길에 군량을 가지고 가니 군사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군대란 담력을 키우는 훈 련이 최고니 담력을 키우지 않으면 만 근을 드는 힘이 있어도 쓸 수 없는 것입니다.”18)
가유약이 1599년 조선에 파견되었던 당시 아들 가상(賈祥)도 도사(都司)의 직함을 띠고 조선에 파견되었다.19)
가상은 1만2천5백여명의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마귀(麻貴) 제독 휘하에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남 원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이어 동래 부산포구에 진출하여 전투를 치르던 중 외원(外援)이 끊겨 부친 가유약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전한다. 이때 가상의 아들 가침(賈琛)이 병부종사관으로서 분투 하여 같이 죽고자 하였으나, 마귀 제독의 만류로 그쳤다. 그리고는 조부인 가유약과 가상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생진 도독동에 임시로 장례를 지냈다. 이후 마귀 제독이 가침의 환국을 권유하였으나, 가침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마귀가 권순(權純)에게 가침을 사위로 삼도록 하고, 묘소를 수호하도 록 하였다고 한다.22) 처부인 권순의 본관은 안동으로, 1551년(명종 6) 알성시에 급제한 인물로, 강 원도 도사와 시강원 필선과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나주목사, 진주목사 등을 역임한 바 있다.23) 이렇게 영남 지역에 연고를 마련하였던 가씨가 태안에 정착한 것은 가침의 아들들인 가성(賈晟), 가호(賈昊), 가병(賈昺), 가수(賈遂) 때에 이르러서이다. 가성 등이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태안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태안에 정착하게 된 것은 향후 정세가 안정되면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24)
3. 분파의 형성과 거주지 확대
태안에 정착하게 된 소주가씨는 이후 9세 때에 29개 파로 분파되었으며, 거주지가 확대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태안은 신라 때 소태현(蘇泰縣)으로 불리다가 고려 충렬왕 때 지태안 군사(知泰安郡事)로 개칭된 것으로 확인된다.25)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는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이었다가 신라에 합병된 후 소태로 개칭되었고, 고려 때 지군사로 변경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군명(郡名)도 성대혜·소태·순성(蓴城) 등으로 기록하였다. 순성 은 태안에 소재한 성곽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군명 가운데 소태를 소개하면서 별호(別號)로 소 주(蘇州)라 불리고 있음을 기록하였다.26) 《신중동국여지승람》의 태안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유 형원(柳馨遠)이 찬술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도 그대로 수용되었다.27)
제4세 때인 가성 등이 태안에 정착한 뒤 소주가씨는 9세 때에 이르러 약 29개의 파로 분파되었다. 권파(菤派), 균파(菌派), 전파(荃派), 훤파(萱派), 만파(蔓派), 연파(莚派), 눌파(訥派), 순파(諄派), 희 문파(希文派), 희성파(希聖派), 만석파(萬碩派), 안성파(安聖派), 문순파(文純派), 문익파(文翼派), 문 혁파(文赫派), 문진파(文晉派), 문헌파(文獻派), 세원파(世元派), 세익파(世翼派), 세한파(世漢派), 세 흥파(世興派), 창순파(昌順派), 창한파(昌漢派), 익한파(翊漢派), 명한파(蓂漢派), 시한파(蓍漢派), 사 성파(嗣聖派), 의민파(義敏派), 수성파(守誠派) 등이다. 대개는 무후(無後) 인물을 제외하고 계파를 형성한 것이다.
분파 형성 과정을 거치면서 거주지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4세인 가성 때에 태안에 정착한 뒤 그 후손들 대부분은 태안 관내에서 거주하였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소주가씨 후손들의 대부분은 태 안의 도내리 송산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이런 가운데 가충민-가균 계파는 팔봉면(현재의 서산시 팔봉면) 일대로, 가제민-가전 계파는 부석면 가사리(현재의 서산시 부석면) 일대로, 가안민-가만 계파는 상옥리(현재의 태안군 상옥리) 고일방축 일대로, 가천민-가안성 계파는 이북면(현재의 태안군 이원면) 일대로, 가응서-가정국으로 이어지는 계파는 양잠리 일대로 거주지가 확대되었다. 이중 양잠리에 거주하는 소주가씨의 경우는 ‘적돌[積乭]가씨’ 또는 ‘가씨의 모자리’라 불린다.29) 가 인남-가창한 계파나 가의남-가명한 계파가 상옥리 서우산 일대로 거주지를 확대하였다.
이들 이외에도 태안 관내를 벗어나 이거하는 계파도 확인된다. 가성-가생한-가호의-가제민-가 훤으로 이어지는 계파는 예산 삽교로 거주지가 확대되었다. 가훤의 아들이나 손자대에 다시 태안 으로 옮겨왔다가 증손자대인 가수우(賈守佑) 때 다시 예산으로 옮겨가는 모습이 확인된다. 예산으 로 옮겨가게 된 배경이나 계기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 가성-가생한-가호의-가완-가권민- 가만석으로 이어지는 계파는 경기 부평 지역으로 거주지가 확대되었다. 이 계파는 이후에도 경기 지역에서 세거하였는데, 가만석의 증손대인 가상만(賈尙萬) 대에 이르러서는 연천 지역으로 이거 하였다. 이밖에 가성-가충한-가천뢰-가림-가응지-가세한으로 이어지는 계파는 도내리 송산 일 대에서 거주하다가 해미로 이주하였다.
4. 과거 급제 및 관직 진출
소주가씨 문중의 일원은 17세기 후반 이후 무과에 급제하거나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소주 가씨 가문 구성원들의 무과 급제나 관직 진출은 조선 후기에 진행된 이른바 ‘황조인(皇朝人)’에 대 한 우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파병된 군사는 조선에 여러 가지 상처를 남겨놓기는 했지만, 재조(再造) 의 은혜를 베푼 존재로써 여러 가지 기념물을 남겨놓았다. 경기도 죽산에 위치한 〈천조부총병오 유충덕청인용비(天朝副摠兵吳惟忠德淸仁勇碑)〉를 비롯해 충청도 은진의 〈마귀평비(麻貴坪碑)〉, 충 청도 보령의 〈유격장군계공청덕비(遊擊將軍季公淸德碑)〉 등이 이러한 예이다. 이후 청나라가 중원 을 장악하자 명의 사대부가 ‘황조(皇朝)’의 유민으로 조선에 망명한 사례가 있었다. 대략 20여개의 성씨가 조사되었다. 이들에 대해 입관(入關)한 청나라가 쇄환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30)
17세기 후반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진압되고 남명(南明)이 멸망하는 등 청국의 상황이 안정화되었다. 더이상 명나라가 회복될 가망이 없게 되었다. 이 즈음 조선에서는 이른바 ‘조선중 화주의(朝鮮中華主義)’가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704 년(숙종 30)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한 것이다.31) 대보단은 명의 마지막 황제인 신종 (神宗)과 의종(毅宗)을 제향하기 위한 제단이었다.
조선중화주의가 대두하면서 본격적으로 명나라 유민(遺民)에 대한 우대 조치가 나오기 시작하였 다. 명조의 후예들에게 관직을 제수하거나 조용(調用)의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대 조 치는 이후 영조대에는 더욱 구체적이고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때는 명조의 후예들과 함께 심 양에 인질로 갔던 봉림대군(후일의 효종)을 귀국길에 배종했던 ‘수룡팔성(隨龍八姓)’도 같이 주목 되었다. 영조대에는 이들을 ‘황조인(皇朝人)’으로 명명하며 이들을 불러 서총대(瑞葱臺)에서 시예 하거나 대보단의 수복으로 차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혜청에 지시하여 미곡을 지급하거나 선찬 (宣饌)을 지급하였다. 대보단에 국왕이 친제할 때는 같이 참석하기도 하였다.32)
아울러 이를 위한 근거 자료로 《화인성책(華人成冊)》이나 《황조인사적(皇朝人事蹟)》 등의 서적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황조인사적》은 한반도에 동래(東來) 중국인 18명의 가승(家乘)을 수집하여 ‚ 그들의 내조시(來朝時)의 상황과 사적‚ 자손에 관한 기사와 역대의 포증사실(褒贈事實)을 모아 편 집한 책이다. 중국인으로 본조(本朝)에 귀화한 향화인(向化人)과 중국인 국적을 그대로 가진 중국 인으로 크게 구분하고 각각의 명단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1754년(영조 30) 6월 기록에 의하면 <향화성책(向化成冊)>과 <화인자손록(華人子孫錄)>이 예조·한성부의 주관하에 장적이 이미 이 루어졌었음을 알 수 있다. <화인자손록>은 당시 예조에서 1부‚ 본도에 l부씩 두어 그들에게 면역 특전을 요청한 기록이다. 이와같이 향화인과 황조인은 구별되어 있었는데 간혹 혼입되어 황조인 이 향화인에 속해져서 세금과 역을 담당하는 예가 있어 이를 변별하기 위하여 <세세장적(世世帳 籍)>이 마련되었고 이는 각각의 <가승(家乘)>이란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가승류를 뽑아보 면 배씨(裵氏)‚ 빙씨(馮氏)‚ 진씨(陳氏)‚ 정씨(鄭氏)‚ 호씨(胡氏)‚ 농서이씨세보(隴西李氏世譜)‚ 황씨(黃 氏)‚ 시씨(施氏)‚ 왕씨(王氏) 가승 등과 광평전씨술선록(廣平田氏述先錄) 등이 있으며 이외에 <국조 보감별편(國朝寶鑑別編)>에 수록된 황조인사록에 관한 부분을 뽑아서 기록하고 있다. 개인 기록 도 채록하였다.33)
영조대에 본격화된 우대 정책 중 명조의 유민에게 중요한 것이 관직에 조용되는 것이었다. 이 에 1764년(영조 40)에는 현절사(顯節祠)와 충렬사(忠烈祠) 배향된 사람들의 후손과 명나라 유민 에게만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는 충량과(忠良科)를 시행하였다.34) 이때 충량과의 급제자에게 주는 홍패(紅牌)에는 특별히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게 하였다.35) 영조대에만도 1772년(영조 48) 3월,36) 1773년(영조 49) 6월37), 1775년(영조 51) 3월38) 등에 충량과를 시행한 바 있다.
정조대에는 훈련도감에 소속된 한인(漢人) 아병(牙兵)을 한려(漢旅)로 편제하고 이들을 발탁하기 도 하였다.
단풍정(丹楓亭)에 나아가 명(明)나라 사람들의 자손을 불러들여 접견하고 한인(漢人) 아병(牙 兵)을 한려(漢旅)로 고쳤다. 하교하기를, "한인(漢人)으로서 우리 나라에 배귀(陪歸)한 사람들을 세자 시절의 효종께서 궁궐 부근에 살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고, 보위(寶位)에 오른 뒤에는 내수 사(內需司)에 소속시켜 식구의 수를 따지어 양식을 주었다. 이어 또 훈국(訓局)의 아병색(牙兵色)에 편입시켜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나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한인 아병을 설치하게 된 전말이다. 당시에는 그들이 방랑하다 우거(寓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아갈 대책이 아득하였고, 게다가 세상이 격변한 초기라 쉬쉬하며 숨겨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만한 정도로도 만 족스레 여겼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는 것도 감히 함부로 홀대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 이르러서는 설시(設施)한 지 이미 오래되고 풍습 또한 예전같지 아니하여, 그들이 스스로 감수하는 바나 사람들이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그야말로 극도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 다. 심지어는 무술(武術)을 열시(閱視)하는 교장(敎場)에서 그들을 가왜초(假倭哨)로 삼기도 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 관리들의 후예로서 이처럼 지극히 천하고 비루한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 말 을 들음에 너무도 유감스럽고 애석하다. 그들을 위하여 기어코 진자리에서 벗어나 마른자리로 옮겨가게 할 방도를 별도로 강구하고 겸하여 곤경으로부터 구제하여 좀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가 는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는데, 일이 제도를 변개(變改)하는 일에 관계되므로 머뭇거리며 주저해온 지가 오래되었다.
오늘은 바로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는 날이다. 그런데 명(明)나라를 받들던 생각과 멸망해버린 나라에 대한 감회를 조금이라도 펼 길이 없다. 번거로움과 힘든 점을 꺼리지 않고 서 밤늦도록 이 일을 갖고서 명나라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반복하여 물어보았다. 이 일을 바로 잡는 일을 어찌 날을 넘기겠는가. 이미 ‘한인(漢人)’이라고 하고 또 ‘아병(牙兵)’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부터 즉시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아병’이라는 명칭을 없애도 록 하라.39)
이들 한려 출신들에게 대보단의 수직을 맡기고 급료를 지급하여 시험 등도 금군의 규례를 적용 하도록 하였다. 파격적인 조치가 단행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황조인에 대한 우대 정책은 17세기 후반 이후 소주가씨 일원이 무과 급제나 관직 진출이 가능한 상황으로 작용하였다.
위 <표-3>을 보면, 처음 무과에 급제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이 가림(賈琳)이다. 가림은 무과 급 제 후 훈련원판관을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8세의 가권민도 무과에 급제하였고, 제주의 정의 현감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이후 9세의 가의민이 무과에 급제하였고, 역시 9세의 가만석은 성 균관 생원 출신으로 확인된다.
소주가씨 일원이 무과에 급제하거나 관직 진출은 대개 13세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13세의 가정 건은 충량과를, 14세의 가익건과 가양건도 충량과를 거쳤고, 가행건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15세에서는 가중영과 가일영, 가우영, 가기영이 충량과를, 그리고 가일영은 더하여 무과에 급제하 였다. 이들은 상당수가 무신의 청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전관천(宣傳官薦)에 포함된 바 있다.41) 14세의 가행건은 자가 강현(疆賢)이고, 호는 석호(石湖)이다. 호인 석호는 가행건의 출생지인 석 호리(石湖里)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행건은 10살 때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 스승을 구하여 사서를 독파하였고, 18세 때부터는 서산에서 살던 이문수(李文秀)를 만나 학문을 익혔다. 이문수로부터유가의 경전 및 성리서 등을 배웠다. 1849년(헌종 15) 10월에 음서로 경릉명정봉지관(景陵銘旌 捧持官)를 제수받았고, 1850년(철종 1)에 통정대부(정3품 상계)에 가자되었고, 1851년(철종 2)에 절충장군(정3품)에 가자되었다. 1852년(철종 3)에는 가선대부(종2품 하계), 그리고 이어서 가의 대부(종2품 상계)에 가자되었고, 1853년(철종 4)부터 3년간 안흥수군절제사로 봉직하였다.42) 가행건은 당대 세도가인 안동김씨를 비롯해 다수의 인물들로부터 후원과 지원을 받았다. 그의 인맥은 문집인 《석호집》에 수록된 서신의 수수 인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김좌근, 김흥근, 김유근과 김병지 등을 비롯한 안동김씨 일원은 가행건의 가장 막강한 후원 자였다.43) 조두순에게는 보낸 황조인이 연명한 서찰에서는, 도목정사에서 황조인에 대한 특별 우 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44)
이들 이외에도 가행건의 환갑 때 다수의 인물이 축수시(祝壽詩)를 보냈다. 축수시를 보낸 인물은 다음과 같다. 다만, 표에는 친족 인물은 제외하였다.
위 <표-5>에 열거한 인물 중 왕은주와 석천구, 이병한의 경우는 이른바 황조인(皇朝人)인 것으로 보인다. 가행건은 당대 황조인 그룹과 인적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들의 유리한 관직 진출을 위해 분투하였다. 이밖에도 안동김씨로 보이는 김현근이 나 문과 출신의 남양홍씨 홍영우, 상원군수 출신 임헌우 등과 일정 정도 네트워크를 맺고 있다. 또 한 향유(鄕儒)인 조존화와 관계도 맺고 있다. 조존화는 19세기 후반 서산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서산군지》(1927)에 따르면 지역의 문사 상당수가 조존화의 문하생이었다고 한다.46) 전술한 바와 같이 소주가씨는 지역 향유들과 인적 교류를 맺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가중영은 1857년(철종 8) 1월 금위영 초관47)을 비롯해 이후 오위장,48) 첨지중추부사,49) 어영청 가사장(騎士將),50) 안흥첨사51) 등을 지냈다. 가중영은 안흥첨사 당시에는 이양선에 대한 처리를 주 관하기도 하였고,52)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진압하는 활동을 하였다.53) 1902년에는 태안에 거주하는 박형빈(朴馨彬) 등이 연명으로 가중영을 봉세관(捧稅官)으로 차출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54)
가일영은 1858년(철종 9) 부사과55)를 비롯해 무겸선전관,56) 훈련원 주부,57) 훈련원 판관,58) 도총 부 경력,59) 우포도청 종사관,60) 울진현령61) 등을 역임하였다. 1874년에는 통정대부에 가자(加資) 되었다.62) 가우영은 1887년(고종 24) 9월 대보단수직관63)을 거쳐 부사용으로 차출되었다.64) 가기 영은 1882년(고종 19) 오위장과65)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66)
5.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 후기 태안에 정착한 소주가씨의 내력과 주요 인물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소주 가씨의 뿌리인 가씨의 연원에서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소주가씨는 대개 주나라 성왕 의 동생인 당숙우의 아들 당공명과 그 후예들이 가백으로 봉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받아들 였다. 소주가씨는 임진왜란 때 명군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가유약을 시조로 하며, 가유약과 아들 가상이 파병지인 조선에서 사망하고 그 후손인 가성 등 형제들에 의해서 태안에 정착한 것으로 말 해진다.
태안에 정착하게 된 소주가씨는 9세 때에 약 29개로 분파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해서 태 안 관내에서 거주지를 이동하거나, 예산이나 경기 부평, 혹은 해미 등으로 거주자가 확대되었다.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무과에 급제하거나 관직을 진출하는 사례가 확인된다. 이는 당시 조선 사 회에 ‘조선중화주의’가 확산되고, 이에 따라 이른바 황조인에 대한 우대 정책이 추진되던 것과 무 관하지 않다. 소주가씨의 경우, 족보에 따르면 7세인 가림 때부터 무과 급제자가 확인된다. 그리 고 13세 이후가 되면 다수가 무과 혹은 충량과 등에 급제하며 당대 무관직 중 청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전관천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한편 소주가씨의 인물 중 주목되는 인물이 가행건인데,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적 소양을 함양하였으며, 성장해서는 안동김씨 김좌근이나 김흥근 등의 지원과 후원 속에서 안흥진첨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가행건 이외에도 가중영이나 가일영, 가우영, 가기영 등은 무과나 충량과를 급제하고 첨사나 오위장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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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123, 2022
〈황조인사적 해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s://kyudb.snu.ac.kr) 디지털서산문화대전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석호집》을 통해 본 가행건의 삶과 경세론
- 정 욱 재(독립기념관 연구위원)
1. 머리말
19세기는 정치적, 사회적,경제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으나,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던 시기였다. 즉 16세기에는 李滉과 李珥 같은 수준의 특정한 사람만이 이해하고 논쟁할 수 있었던 어려운 理氣論, 心性論 등을1)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지방의 유학자들도 대부분 자유롭게 소화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토론하였다. 이런 성리학의 확산 경향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왕 조에서 흔히 문예부흥기의 시기로 꼽고 있는 英祖, 正朝 당시 학계가 京, 鄕의 분기 현상이 일어나 면서 두드려졌다.2) 서울의 학계가 성리학 중심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서적을 통한 박학 중심이라 면, 지방은 성리학에 깊이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향촌에서도 공부한 다고 인정받는 유생은 최소 사서삼경 내지 사서 정도는 대부분 본문과 주자의 주석까지 암송할 정 도로 성리학에 대한 기본 이해가 그 어느 시기보다 깊어지고 있었다.
혼란한 시대적 분위기와 다르게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난숙해져 가는 상황에서 특히 지방에 있는 거주하였던 유림은 과거를 통한 ‘立身揚名’과 학문수양을 통한 ‘獨善其身’의 사이의 어느 지점 에 서서 갈등,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19세기는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 은 문집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을 것이다.
역사가 인간집단의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3) 이해될 때, 비록 역사에서 업적을 남기지 못한 개인 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기록일지라도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다시 말 해 초야에 묻혀서 역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던 어떤 ‘존재’의 단순한 삶의 기록도 앞으 로 사회과학적·역사적 방법론의 발전에 따라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와 인식의 지평을 가져다줄 가 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기록은 ‘기억’되거나 ‘기억’되어주기를 바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즉 세대와 세대 를 잇는 ‘존재’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우리는 역사 앞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확 고히 인식하게 하며, 현재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미래에 대한 통찰적 전망을 더욱 심화시켜 준다. 반대로 ‘존재’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면 빈약할수록 우리의 정체성은 그만큼 약해지며, 현재를 이 해하고 미래를 통찰하는 역사적 상상력은 더욱 빈곤해진다.
‘존재’의 ‘이야기’를 잘 보여주는 문집의 상당수가 우리 역사의 격변기 중의 하나인 근대이행기 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간행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나마 19세기 중후반에 태어 나서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유림에 대한 문집의 존재 및 간행을 조사한 연구가 있어 대체적인 모습 을 엿볼 수 있다.4) 이 글에서 살펴볼 賈行健(1798~1865)은 다사다난한 19세기 전반기를 살며 말 년에 ‘임술민란’을 경험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다행히 《石湖集》5)이라는 문집을 남기고 있어 가행 건 본인이 평소 지녔던 생각과 현실인식 등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 이 글은 우선 그가 남긴 문집 《석호집》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에서 생소한 가행건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그의 가계와 활동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다음으로 그가 남긴 〈三政對策〉을 통하여 그의 경세론 이 지닌 특징의 일단을 파악하고자 한다.
2. 가행건의 가계와 활동
가행건은 1798년 8월 26일(음력) 蘇城(지금의 태안)의 石湖里 자택에서 아버지 賈宗軾과 어머니 徐有根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蘇州이며, 자는 疆賢, 호는 石湖인데 그가 태어난 지 명을 호로 삼았다.6) 그는 이른바 ‘皇朝遺民’의 후손으로 소주가씨가 현재 海東祖로 삼고 있는 사람 은 賈維鑰이다. 가유약은 가행건의 13世祖로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5월(음력)에 兵部主事의 신 분으로7) 조선에 와서 명의 군대를 위로하고 돌아갔다.8) 1599년 윤4월(음력)에 兵部郎中으로 다시 조선에 왔으며9) 부산에 명나라 장수 萬世德의 기공비문을 지었다.10) 가유약의 아들은 賈祥으로 역 시 임진왜란 시기인 1599년 6월(음력) 조선에 左營都司로 들어왔다가 1600년 7월(음력)에 돌아 갔다.11) 가상의 아들이자 가유약의 손자는 賈琛으로 《석호집》에 의하면, 그가 태안에 터를 잡아 소 주가씨의 가문을 일으켰다고 한다.12) 즉 소주가씨는 가유약을 해동조로 삼고 있으나, 태안에 자리 를 잡고 세거하며 사실상 소주가씨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손자인 가침인 셈이다. 자료의 한계로 가침의 행적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가유약-가상-가침으로 이어지는 3대가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에 와서 도왔던 행적은 가행건을 비롯하여 소주가씨 구성원들에게 큰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이후 지방 읍지에서 태안지역의 성씨를 거론할 때 소주가씨는 나란히 거론되는 가문으로 인정받 았다.
황조유민의 가문에서 태어난 가행건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이 대단하며 재주가 명민하여 4 세 때 글을 배우고 6세에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13) 10세에 외가에서 성장하였는데, 외삼촌이 그를 사랑하여 돈을 내어 스승을 구하여 四書를 읽도록 하였다.14) 그가 외가에서 자라게 된 이유는 아 마도 그의 아버지 가종식이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15) 사실상 외삼촌이 아버지 역할을하며 가행건이 학문을 배우는 데 필요한 기초를 닦아주었으며, 가행건 역시 외삼촌의 사랑과 은혜 를 잊지 않았으며 평소 스승으로 생각하였다.16)
학문의 기초를 닦은 가행건이 본격적으로 성리학에 몰두한 것은 18세부터였다. 그는 18세에 瑞 山의 延安 李文秀에게 학문을 배웠다.17) 이문수가 어떤 인물인지 자료의 한계로 정확히 알 수 없 다. 다만 가행건이 학문을 배울 정도로 학식이 깊은 인물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서산에 거주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重山齋 李趾秀(1779~1842)의 삼종형으로 언급되는 이문수가 아닐까 한 다.18) 이문수는 가행건의 재주와 식견을 기특히 여겨서 ‘儒道’로 가르쳤고 가행건은 스승의 가르 침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잊지 않으며 유가의 경서를 관통하였다고 한다. 그는 四書로부터 시 작하여 주돈이의 《太極圖說》, 朱子의 《訓義》, 《易學啓蒙》, 《近思錄》 등을 읽으며 그 요령을 터득하 였다.19) 그가 이문수에게 배운 유도는 다름 아닌 성리학이었으며, 그가 읽었던 책들 역시 성리학 서적이었다. 스승 이문수에게 배운 성리학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학문에 진력 하여 상당한 학식을 쌓게 되었다. 이런 학문적 수양이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小 學要語〉를 지을 수 있었고 心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었으며,20) 또 국가의 위기상황에 서 우국애민의 마음으로 〈三政對策〉을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황조유민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어 선조의 명성과 공적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 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21) 또한 자신이 배운 바를 세상에 펼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 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떨어져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출세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가 서 학문에 전념할 처지는 아니었다. 홀로 남은 노모의 봉양과 가문을 일으켜야 하는 책임감 때문 에 그는 한양에 올라가 직접 당대 세도가문과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다. 《석호집》에 그가 안동 김씨의 金左根•金興根 형제, 趙斗淳 등에게 보낸 간찰이 실려 있으며, 특히 김좌근과 화창한 시가 상당수 수록되었다.22) 그는 김좌근의 문하가 되었는데, 이는 그 자신의 노력이 있겠지만 김좌근이 그의 학식과 가문의 내력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김좌근의 문하에서 16년 동안 활동하며 그의 정치활동을 도왔으며,23) 김좌근 형제도 그를 빈객으로 예우하였다.24)
가행건은 1849년 10월(음력)에 蔭薦으로 景陵銘旌奉持官에 제수되었고 1850년 2월(음력)에 通 政大夫에 승직하였다고 한다.25) 관찬사료에 의하면 가행건은 1851년 윤8월 13일(음력) 五衛將에 임명되었으나,26) 같은 해 9월 23일(음력) 지방에 있어 肅拜를 하는 기간을 지나기 때문에 改差되 었다.27) 같은 해 10월(음력)에 절충장군에 올랐고, 이 해에 三世忠孝로 유생들이 조정에 상소하니, 특별히 祠宇와 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고 한다.28) 1852년 4월 17일(음력) 다시 오위장에 제수되 었으나29) 5월 1일(음력) 지방에 있어 올라올 기약이 없다고 하여 개차되었다.30)
가행건은 관직을 얻어 자신의 경륜을 펴고 싶었으나 쉽게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가, 1853년 6 월 26일(음력) 安興鎭僉節制使(이하 안흥첨사)에 임명되었다.31) 그의 고향이 태안이고 황조유민의 후손인 점, 그리고 김좌근의 후원 등으로 인해 안흥첨사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로 가행건은 비로소 자신이 평소 바라던 자신의 경륜을 펼칠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그가 부 임한 안흥진은 결코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안흥진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삼남지방에서 경기로 들어가는 주요 요충지였다. 안흥진에 산성이 축조되었 고 이에 따라 산성 내에 창고가 건립되어 다수의 군향미가 저장되었으며 그 산성과 창고를 수호하 기 위하여 산성 소속의 육군이 편성되었다. 대동법 시행 이후 세곡 운송이 중요하게 되어 이를 호 송하는 업무의 역할과 致敗를 단속해야 하는 책임도 강조되었다. 또한 수군진으로서 전선이 배치 되고 수군이 배속되었다. 이렇게 조선후기에 이르면 안흥진의 역할과 기능이 매우 다양하게 분화 되어 역설적으로 안흥진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안정적으로 제도화해야 하는 난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당대부터 안흥진이 작은 鎭임도 불구하고 첨사의 지위가 ‘難治’라고 언급되고 있었다.32) 가행건은 안흥첨사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안흥진의 현황과 거주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살펴보았다. 그가 지은 ‘海溢’이란 시 한 수를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衝波決洑走良田파도의 충격으로 보 터져 良田으로 달려가니 極目平沙轉渺然눈길 닿는 데까지 끝이 없는 모래펄이 되었네. 欲睹禾苗無覔處벼 싹을 보고 싶어도 찾을 곳은 없고
提笻爲向地中穿지팡이 짚고 향하는 곳마다 땅 속만 뚫어가네.33)
바닷가를 끼고 있는 곳은 늘 자연재해를 피할 수가 없는 법으로, 해일이 일어날 때마다 백성들이 공들어 농사를 지은 땅이 모래로 뒤덮이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그가 관할한 지역은 척박한 토지 로 곡식도 잘 자라지 않는 곳인데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여 백성들이 바다에서 생계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현장을 찾아가서 백성들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였다.
吳翁張老好顔開오씨 어르신 장씨 노인 기뻐하는 얼굴로 前度賈生今又來전번에 왔던 賈生이 오늘 또 왔다고 하네. 細問秋郊豊歉事자세히 가을 농사의 풍흉을 물어보니 不容人力是天灾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天災라고 하네.
敬承尊命到秋深왕명을 받들어 깊은 가을에 와서
地利農形處處尋곳곳을 찾아 땅의 형편 농사 사정 살피네. 每陟高崗瞻左右언제나 높은 언덕 올라 좌우를 굽어보며 得無隴斷丈夫心농단하는 이 없는지 살피는 장부의 마음.34)
그가 평생 익힌 성리학의 목적은 ‘修己治人’ 또는 ‘內聖外王’이다. 그는 자신이 배운 바를 실행하 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농사의 전반적인 상황을 직접 농민에게 물어보고, 관할지역 곳곳을 돌아다 니며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이가 없는지 살피는 등 ‘治人’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즉 애민사상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안흥첨사의 직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54년 10월(음력) 안흥첨사 가행건은 牒呈을 조정에 올려 10월 1일(음력) 전라도 해남현•진도군•강진현의 田稅를 함께 실은 세곡선 1척이 큰 바람로 인해 敗船되어 즉시 패선된 곳을 간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그 는 현장을 가서 패선된 상황을 확인하고 그 배에 탔던 監官•色吏•沙工•格軍들에게 패선하게 된 곡 절과 곡물을 수효를 查問하여 자세한 내용을 첩정으로 보고하였다.35) 이후 조정은 이에 대해 자세 한 조사를 진행시켰으며, 결국 세곡선 1척의 패선 사건은 가행건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 다. 같은 해 12월(음력) 호송을 맡은 가행건은 관할지역에서 뱃길을 제대로 인도하여 호송하지 않 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36) 가행건은 이 일로 인해 안흥첨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으며, 그 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후손과 후학을 가르치는 등 ‘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 1862 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이에 대해 가행건은 자신의 견해를 담은 〈三政對策〉을 작성하였고, 1865 년 12월 23일(음력) 석호의 자택에서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7)
3. 〈三政對策〉의 내용과 특징
가행건이 살았던 19세기 전반기는 이른바 ‘세도정치기’로 특히 三政으로 대표되는 부세체제의 누적된 모순으로 인해 백성의 삶이 매우 힘들었던 시대였다. 1862년 그의 나이 65세에 단성과 진 주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이 일어나 삼남지역을 휩쓸었다. ‘임술민란’은 철종을 위시한 위정자들에 게 큰 충격과 함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습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당 시 지배층은 민란이 일어난 가장 중요한 요인을 삼정문제로 인식하였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 기 위하여 5월 26일 三政釐整廳을 설치하였다. 6월 12일 철종은 策問을 내려 중앙 관료와 전국의 지방관은 물론이고 재야의 유림에게도 삼정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진달하 게 하였다.38)
우선 철종이 내린 책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철종은 임술민란이 발생한 원인을 삼정 문란으로 보고 책문에서 하문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田政의 경우에는 20년 1양전의 원칙이 지켜 지지 않았기 때문에 陳起나 소유권의 변화 등이 토지 파악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하 고 그에 대한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양전을 해야 하는데 그에 필요한 인재 등용과 재원 마련 방 안을 물었다. 둘째, 軍丁의 경우 임란 이후 군역의 납포화가 급격히 진행된 것이 문제라 전제하면 서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壯丁을 査括할 때 冒稱幼學의 쇄환과 投托閑丁의 혁파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처리 방안을 물었다. 셋째, 還政의 경우 진휼제도였던 환곡이 재정충당의 수단으로 변질된 점 이 문제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 환곡의 축소 혹은 폐지를 한다면 取耗補 用하던 經用의 給代 방안을 물었다.39)
철종의 책문에 대해 내외의 관리와 경향의 유림은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발휘하여 삼정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담은 삼정소를 조정에 올렸다. 전국에 수많은 삼정소가 올라왔고 조정에서는 이를 검토하여 시상을 하고 삼정대책에 반영하였다. 이때 수렴했던 삼정소를 조정에서 정리해 두었는 지 알 수 없다. 다만 제출자 가운데 일부가 그 내용을 자신의 문집에 수록해 놓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삼정문제와 그에 대한 유림의 동향•인식 등을 파악할 수 있다.40)
가행건 역시 평소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펼치기 싶었기 때문에 당시 65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 구하고 〈삼정대책〉을 지었으며, 그 내용이 문집인 《석호집》에 실려 있다. 현재 파악된 삼정소를 작성한 인물 중에 가행건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이인필•금술효•윤식•허전•기승규 등 5명에 불과하며, 이인필만 70대이고 다른 4명은 60대이다.41) 가행건이 68세에 사망한 것을 고려한다 면, 〈삼정대책〉은 사실상 말년에 작성된 것으로 자신의 식견을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안흥진첨사로 관직생활을 하며 직접 백성의 힘든 삶을 목도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 하던 인물이었다. 〈삼정대책〉에 그의 학문적 역량과 애민사상이 짙게 배어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 과 사상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삼정대책〉을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 다만 그가 지은 〈삼정대책〉이 실제로 조정에 올라가서 평가를 받았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철종의 책제를 등서하여 전국에 하송하면 지방민이 작성하여 읍에서 모 으고 도에서 상송하도록 하였다. 상송의 기한은 원도, 중도 근도를 나누어서 각각 70일, 50일, 30일로 잡았으며, 이는 먼 지역이 대책까지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런 내용을 담은 비변 사 관문은 전국 각 도, 각 고을로 전달되었다. 어떤 고을의 유림 중에 책문에 대해 응제한 사람들 이 작성한 삼정소를 해당 고을 수령에게 올리면, 수령은 그것을 모아서 감영을 거쳐 서울로 보내 는 것이다.42) 아마 가행건의 〈삼정대책〉도 이런 과정을 통해 올라갔으리라 생각한다.43)
가행건이 철종의 책문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삼정대책〉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그는 지금 이 때가 “나라를 중흥일신 할 수 있는 시기이자 정사를 펴고 교화를 바꿀 때입니다. 국가를 유지하고 안전하게 하는 것은 삼정이 으뜸이 되며, 백성들이 우러러 의지하고 따르며 받들게 하 는 것은 삼정일 뿐”이라 하며,44) 삼정을 올바르게 한다면 임술민란이 일어난 국가적 위기를 오히 려 중흥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조선왕조에서 펼친 삼정은 원래 좋 은 법이기 때문에 반드시 멀리 요순시대를 사모하고 삼대에서 법을 취할 필요는 없으며 삼정의 어 느 하나라도 폐지하기 어렵다고 하였다.45) 무엇보다 그는 지금을 위한 계책은 합당한 사람을 신중 하게 선택하는 것이라 하면서 나라의 정치는 오직 敬과 儉 두 글자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46) 이어 서 그는 田政•軍政•還政에 대한 제도적인 내력을 각각 요령 있게 설명하고 현재 발생한 심각한 폐 단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전정에 대해 살펴보면 가행건은 仁政은 반드시 改量에서 시작해야 하며 지금 양전이 중단된 지 백 여년이 지났다고 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토호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경계가 올바르지 않고 거친 땅이 많으나 白地徵斂이 줄어들지 않은 폐단을 언급하며 이를 위해 올바른 양전을 주장 하였다.
剛明한 관찰사로 하여금 엄격한 [양전] 과정을 확립하여 각 고을 수령에게 신칙해야 합니다. 舊案을 두고 陳起를 분별하여 字號를 따라서 遠近을 나누면, 도낏자루를 잡아서 도낏자루로 쓸 나무를 베는 것이고 도장으로 관청의 도장을 찍는 것이니, 백성이 속이는 일과 관리들의 간사 한 짓이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海溢이 방죽을 깨뜨려서 그 물이 흘러 모래가 뒤덮인 땅과 山林의 위아래로 돌이 많이 섞인 거친 땅, 또 골짜기 좌우로 뒤집힌 곳은 成案하여 執稅하는 것은 옮 지 않습니다. 田分 6등법의 경우 세금은 5가지인데 그 밭의 중간에서 潤色하고 增損하는 것은 모두 그 일을 맡은 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 임무는 해당 읍의 수령이 마을에서 힘이 있고 지조가 있으며 논밭의 結卜을 잘 계산하는 사람들 중에서 뛰어난 자를 뽑아서 측량을 살피게 하여 奸僞 를 변별하는 것입니다. 또 해당 읍의 수령에게 舊案과 新量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자세히 살피 게 하되 아전 무리가 그 사이에 참여하고 간섭하지 못하게 하면, 원통하게 징수되는 백성이 줄 어들 것이고 도둑질하는 관리는 이에 찾아낼 것입니다.47)
가행건의 삼정대책에서 가장 중요한 급선무이자 전제 조건은 합당한 인재를 얻는 일이다. 성리 학적 가치체계를 내면화한 가행건에게 합당한 인재는 능력 뿐만 아니라 도덕적 수양이 된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이 자리에 있어서 양전 사업을 진행한다면 삼정의 폐단을 바꿀 수 있다는 낙 관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해일에 의해 둑이 무너져 바닷물로 인해 모래가 뒤덮인 땅 등에 세금을 징수하지 말라는 구체적인 표현은 그가 안흥진첨사를 하며 백성의 삶을 살핀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가행건은 당시 발생한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위정자가 마음을 닦 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임금에게도 主一無適의 敬을 가지고 몸소 節儉하여 사 치를 없애는 모범을 보이면 백성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48) 사실상 철종에게 도덕 적 각성과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군정에 대해서 그는 전정과 비교하면 오히려 쉽게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자신하며 다음과 같이 대 책을 내놓았다.
먼저 양반과 조상의 묘소가 있는 마을에서부터 아전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조사하여 모아 소략한 바를 줄이고 疤記하여 정합니다. 또 校奴院 소속, 宮莊의 규정 외의 소유 家戶, 사 찰의 거짓 승려, 거짓으로 [양반을] 사칭하고 [幼學을] 冒錄하는 부류에 대해 일제히 빗질하듯 샅샅이 조사하여 오직 감당할만한 사역만 남기고 아울러 충원되지 못한 군적에 붙인다면, 의지 할 곳 없이 외롭게 떠도는 백성의 黃口簽丁과 白骨徵布 같은 부역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49)
사실 19세기 군역은 군포수입의 확보가 목적이 될 정도로 그 기능이 변질되었다. 군포수입을 포 기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 지배층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란 군포수취의 재정적 기능은 그대로 두고 민중에 대한 부담을 최대한 줄이는 데에 두었다. 이런 방안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避役행위를 봉쇄하고 규정을 개량함으로써 군역제를 본래대로 유지하는 것이었으며(良役 變通), 다음은 현실적으로 모순이 많고 불합리한 군역제를 전면적•근본적으로 변혁함으로써 새로 운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戶布論). 셋째는 현실적으로 변동하고 있는 군역제를 그대로 인정한 채 폐단을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收稅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었다(軍役田).50) 가행건이 제안한 대 책은 첫 번째 방안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철저한 호적 조사를 통해 인원을 제대로 파악하고 궁 장과 사찰 등으로의 투탁 등을 막아서 군적을 충원하는 방식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를 기회로 각 고을의 才勇 있는 군인을 정선하여 三營의 늙고 약한 병졸을 대체해야 한다고 하였다.51) 삼정의 폐단 중에서 백성들의 삶을 가장 고단하게 만든 것은 환곡이었다. 원래 환곡은 백성의 진 휼을 목적으로 만든 제도였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진휼기능은 많이 약화되면서 각종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즉 환곡의 목적이 진휼에서 재정보충으로 본연의 기능이 왜곡되어 부세화되면 서, 가행건이 언급한 것처럼 환곡은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52) 이런 현실에 대 해 가행건이 대안으로 주목한 것은 ‘民社’, 즉 社倉制이었다.
다시 糶糴을 바로잡을 방법을 생각해보니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民社에 저축하는 것이 좋으니 오래 밀려서 거두기 어려운 것을 다 없앨 수 있습니다. 현재 당연히 납부해야 할 것을 다 취하여 定例를 상세히 하고 받은 것은 총수를 합하여 계산합니다. 그 절반은 먼저 급한 경비로 끌어서 보충하고 나머지 절반은 각 道의 饒戶•四窮과 고용된 백성들에게 분급하며 절대로 [그 들의 것을] 받아먹어서는 안 됩니다. 부유하고 간악하며 교활한 관리는 용서해서는 안 되며, 長 老가 각 面에 社倉을 세워 그 곡식을 저장해야 합니다. 곡식이 비싸면 팔아서 그 이자를 거두고, 곡식이 싸면 바꾸어 저축합니다. 그러면 몇 년이 안 되어 사창에 쌓인 것이 반드시 많아질 것이 며, 기근과 환난을 구휼하는 데에도 어렵지 않습니다.53)
가행건이 주장하는 사창제는 면리 단위에 창고를 설치하고 백성의 자율적인 운영을 통해 진휼 기능을 주로 수행하는 방안으로 부세 기능을 없애고 관리의 주체를 국가에서 향촌자치조직으로 이관하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이미 주자를 비롯하여 17세기 李端夏와 安鼎福 같은 인물들도 주창 한 바 있다. 삼정소를 올린 인물 중에 柳重敎가 사창제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화서학파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54)
그의 삼정대책은 비슷한 연배의 허전(1797~1886)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그의 글 은 허전에 비해 부드럽고 요약적이며 철종의 책문에 충실히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비해 허전의 글은 강경하고 신랄한 표현으로 당대 현실을 냉정하게 비판하였으며 대책을 개진할 때에 도 많은 사례와 전거를 들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가행건은 구체적인 수치와 전거를 사 용하는 것이 드물고 평소 자신의 생각했던 바를 요약하여 담담하게 현실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견해도 그런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그는 결코 임술민란을 조선왕조를 뒤흔들 시대적 위기로 인식 하지 않았으며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의 차이점에 대한 예를 한 가지 든다면, 허전은 민란을 일으킨 주체는 백성이지만, 민란 을 일으키게 원인을 제공한 자는 탐관오리, 즉 수령과 이서라고 단언하며, 지금 수령과 이서의 탐 학으로 생긴 피해가 오랑캐 침략과 도적의 약탈 및 맹수의 위험보다 더 심하다고 여겼다.55) 그에 비해 가행건은 수령과 이서의 탐학을 민란의 원인으로 단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간이 오래 흘 러서 생기는 구조적인 폐단으로 인식한 것 같다. 그리고 당시 백성들이 비난하던 향리의 경우, 가 행건은 그들이 公心은 적고 私情이 많은 狐鼠와 같은 존재라고 여겼으나, 관청에서 주는 급료가 없으니 결국 국가의 곡식을 훔치는 구멍을 열어준 것이라고 하여 일방적으로 향리만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 이래로 모두 급료가 있었는데, 조선에 이르러 한갓 役吏가 되니 생 계를 잇기 어렵다고 하며 역사적인 사고를 통하여 향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다. 즉 급료를 받지 못하는 향리가 생계를 위하여 환곡 등에서 농간을 부릴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56)
사실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인정되는 향리 문제는 당시 삼정소를 올린 많은 유림의 보편적인 관 심사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부분 향리에게 급료를 주자고 한 것은 공통점이다. 싫든 좋든 향 리는 지방의 관청을 운영하는 주체로 각종 행정업무에 능통하고 지방 사정에도 밝았다. 또한 다른 지역의 향리와 연계하여 수령에게 압력을 행사할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무시하지 못할 힘을 지니 고 있었다. 더구나 19세기 관과 민 사이의 부세 갈등이 점차 심각해지는 추세 속에 중간자적 역할 을 하는 향리의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57) 가행건 역시 향리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관료의 월봉을 줄여서 향리에게 半量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58)
가행건은 삼정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압축적•체계적으로 밝혔지만, 철종이 질문했던 각종 비용 문제와 재원 마련 방안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환 곡을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할 경우 필요한 비용이나 取耗補用하던 經用의 給代 방안에 대해서 그는 구체적인 수치와 방법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위에서 인용한 글처럼 상대적으로 추상적•이상 적인 답변을 한다는 점에서 그의 삼정대책은 일정 부분 한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三政 對策〉은 가행건의 憂國之心과 愛民之情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성리학을 성실히 수학하였다 는 점도 알려준다.
4. 맺음말
가행건은 이른바 ‘황조유민’의 후손으로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 아버지 를 여의고 외삼촌에게 양육되어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세에 이문수에게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배웠으며 상당한 학식을 쌓았다. 이는 추후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노모와 봉양과 조상의 선양을 위하여 그는 많은 노력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세도가문의 김좌근 형제의 문하가 되어 예우를 받 았다.
황조유민의 후손이란 점과 김좌근의 후원으로 1853년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안흥첨사가 되어 자신의 경륜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는 안흥첨사로서 백성의 고단한 삶을 직접 살피고 그것을 해결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할지역에서 세곡선 1척이 패선되는 불행한 상황으로 인해 만 2년도 채 못 되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흥첨사를 마지막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지 않고 향리에서 후손과 후학을 가르치는 등 ‘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 그후 1862년 임술민란을 목도하자 철종의 책문에 적극 호응하여 65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압축한 〈三政對策〉을 작성하였다. 이 때는 그가 사망하기 3년 전으로 사실상 마지막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독실한 성리학자로 생각과 언행이 모두 성리학적 가치체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삼 정대책〉의 특징은 우선 위정자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합당한 인재를 뽑아 임용되면 문 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이상적 사고가 깊게 깔려 있다. 철저한 호적 조사와 사창제 실 시 등을 주장 하는 〈삼정대책〉은 비록 한계가 있었지만, 조선왕조가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행건은 비록 많은 글을 남기지 못하였으나, 19세기 전반기 조 선의 지방 유림이 지닌 일반적인 학문 수준이 어떠한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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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집》에 나타난 19세기 태안 안흥진성의 실상
- 박 범(공주대학교 교수)
1. 머리말
안흥진은 고려시대 이래 삼남지방에서 한성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삼남 지방의 어떠한 선박도 안흥진 앞 바다를 거쳐야 한강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안 흥진의 역할은 매우 커지고 다양했다. 그러한 결과 안흥진에 산성이 축조되었고 창고가 건립되었 으며 산성을 보호하기 위한 군제가 편성되었다.
대동법 시행 이후 세곡선의 수가 증가하면서 안흥진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조운선을 호송해야 하는 업무가 매우 중요해졌다. 이를 단속해야 하는 책임 또한 안흥진에 주어지면서 첨사의 역할도 강화되었다. 안흥진은 본래 수군진으로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산성을 관리해야 했으며 창고 를 책임지고 조운 관리도 맡았다. 안흥진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기능과 역할이 주어지면서 이를 안정적으로 제도화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
그 동안 안흥진에 대한 관심은 수군진으로서의 역할과 분석에 맞추어졌다. 안흥진의 설치 과정 과 안흥진성 내 마을 구조를 살펴보거나 안흥진성에 비축된 안흥군향곡의 운영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가 제시되었다.1) 또한 안흥진을 강화도 방어체제의 일부로서 그 역할과 위상에 대한 연구 도 확인할 수 있었다.2) 최근에는 안흥진 관련 자료가 발견됨에 따라서 안흥진이 가진 위상을 재발 견하는 연구 성과들도 나타났다.3) 이외에도 안흥진의 역할과 기능에 맞추어 제도 정비 과정을 살 펴보거나 안흥진의 위상을 첨사 재임 실태와 관련하여 살펴본 연구도 있다.4) 단일 진(鎭)으로는 가장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는 대부분 17~18세기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19세기 이후의 실상 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흥진의 연구를 조선후기 내내 제도가 고정 된 형태로 정형화된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 연구 성과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안흥진은 선행연 구에서 본 것과 같이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다양한 변화 양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것은 안 흥진의 안정적인 제도 정비 과정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안흥진에게 주어진 역할에 맞추어 중앙정부 및 안흥첨사 입장이 어떻게 운영에 반영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본 글에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필자의 선행 연구를 뒤 이에 서 19세기를 주된 연구 시기로 삼고자 한다. 19세기 전반에는 암행어사의 서계와 별단에서 보이 는 안흥진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보고자 한다. 암행어사는 안흥진 운영 중에서 당대 문제가 되 고 있는 사항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18세기에 제시되었던 문제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19세기 중반 《첩보선집》을 통해 본 안흥진의 운영 양상은 무엇인가를 보고자 한다. 해당 자료에는 안흥진에서 주고 받은 공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실제 모습을 구체적 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석호집》에 보이는 안흥첨사 가행건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가행건은 1853년(철종 4) 6월 안흥첨사에 임명되어 약 2년간 근무하였다. 《석호집》에 단편적으 로 남아 있는 안흥진의 모습을 통해 그가 파악한 운영의 실상을 구체화해 보고자 했다.

2. 19세기 전반 암행어사가 본 안흥진의 문제점
안흥진은 본래 통치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이러한 곳을 난치(難治)라고 불렀다. 보통은 군현 수령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러한 군현을 난치읍(難治邑)이라고 하였으나 안흥진도 그러한 곳 중 하나였다. 1798년(정조 22) 12월, 충청수사 구명원의 계본에 대한 전교에서 정조는 안흥진에 대 하여 난치(難治)라고 하면서 안흥진의 백성들이 번영하는가 쇠퇴하는가의 문제도 있지만, 안흥군 향곡이나 조운과도 관계를 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고 언급하였다.5) 안흥진이 난치인 이유는 안흥진에 맡은 역할이 맡아서라는 점을 정조가 잘 알고 있던 셈이다.
1799년(정조 23) 12월, 비변사의 관문(關文)에 따라 충청수영에서는 여러 가지 폐단을 조사하게 되었다. 당시 안흥첨사 이한두는 첩정을 통해 안흥진이 겪고 있는 문제를 조목조목 나열하였다. 내용이 매우 길기 때문에 중요한 요점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 주사(舟師)에 탑승하여 능로군은 부근 면리에서 모집하여 충정해야 하는데 군액을 채우지 못하는 문제
② 안흥진 장내 둔전을 거두는데 감색과 색고들이 과도하게 징세하는 폐단
③ 강도의 외부로서 군향을 많이 쌓아 놓아야 하는데 흉년에 진휼곡으로 빌려주었음에도 불 구하고 되갚지 않고 있는 문제
④ 본진에서 납부하는 진상용 생복을 납부해야 하는 폐단
⑤ 호송 지역이 처음에는 30리만 담당하다가 정조 연간 이후 100리 이상 늘어나게 된 문제
⑥ 본진의 거주민은 대부분 모집해 온 사람들로 농사를 짓는 자가 적고, 배를 타는 자가 많으 나 선상(船商)의 이익이 적어 흩어지고 있는 상황
⑦ 마지막으로 첨사의 신분이 미천하고 명망이 가벼워 위령이 서지 못한 문제6)
사실 이러한 문제는 17~18세기 내내 문제제기 되면서 제도 정비 과정과 굴항(堀項) 시도를 통해 서 해결하자 하였으나 결국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던 문제들이었다.7) 19세기에도 여전이 이러한 문제를 안고 안흥진을 운영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1808년(순조 8) 6월, 공충우도암행어사 김상휴의 별단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안흥진의 중요성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흥진이 강화도를 후방에서 지원해야 하는 곳이 라는 점, 호남과 영남을 총괄하는 국가의 요지이고 국방의 중요 거점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 다. 문제는 안흥진이 맡아야 할 역할이 중요한 만큼 재정도 튼튼해야 하고 주어진 역할을 맡아야 할 사람도 많아야 하지만 경작지는 좁고, 백성의 수는 적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군사의 수도 적고 재정도 궁핍하다고 어사는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어사 김상휴는 그 동안 제시되었던 해결책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여기에 주목 해 보자.
그 방법이란 것이 고작 ‘사람이 많아져야만 굳건히 지킬 수 있다’라는 것이고, 사람들이 많아 지는 방법이라는 것도 고작 ‘땅이 비옥해야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영의 성곽 오른쪽 서쪽 지역에 방죽을 쌓아 전답을 만들 수 있 는 곳이 있습니다.8)
어사 김상휴가 보기에 안흥진을 수성(守城)하기 위해서는 백성이 많아야 하며 백성이 많아지려 면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농토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동안의 정책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 다고 지적했다. 즉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적극적인 방축(防築) 말고는 답이 없다고 말 했던 셈이다. 방축이 만들면 백성들이 멀리서도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될 것이고 이후 방어영을 설치하여도 제도와 재정을 감당할 수 있어서 큰 도회지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9) 어사 김상휴가 보기에 사실 그게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던 것이다.
19세기 전반 암행어사들의 연이은 제언 축조 주장은 사실 근거를 두고 언급된 것이다. 위 지도 는 안흥진 주변에서 제언을 축조한 곳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왼쪽 아래에 띠지로 붙어 있는 구굴 항(舊堀項)이라는 표현은 18세기 전반 시도 되었던 안흥첨사 이선의 공사를 가리킨다.10)
‘구굴항’과 관련된 내용 이외에도 다수의 띠지와 글귀가 확인된다. 이는 대부분 제언 축조와 관 련된 내용들이다. 위 지도는 19세기 전반 다수의 암행어사들이 제언을 주장하였고 충청감사도 제 언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현지 답사를 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고 판단된다. 제언 축조와 관련된 사실은 크게 네 곳에서 확인된다.
①은 ‘此黑石高完....’이라고 되어 있다. 흑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석축을 쌓은 흔적이다. 높게 쌓 았을 뿐만 아니라 완성된 석축이라고 판단된다. 완성된 형태의 내역은 ④에서 보이는 ‘完築處’라 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영주봉 아래로 내려오는 산줄기로 흑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있는데 이곳도 석축이 완성된 흔적으로 보인다.
②은 ‘箕柵禦水前頭聚沙泥生處’라고 하여 기책(箕柵)을 세워 두고 바닷물을 막게 하고 이를 통해 모래와 진흙이 쌓이도록 한 곳이다. 석축으로 쌓은 곳의 바다 부분으로 이곳은 석축과는 직각으로 여러 줄기의 기책을 세워서 모래와 진흙이 구간별로 퇴적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는 석축이 조수 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③에서도 확인된다. ‘防築後前頭泥生處’라고 하여 방축을 한 뒤에 앞 부분에 진흙 땅이 형성된 곳이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축조 공역이 진행된 이후 시간이 흘러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아마도 암행어사들은 이를 보고 판단했 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사 김상휴의 제안에 따라서 1808년(순조 8) 11월 충청감사 정만석이 관련된 내용을 조사 보 고하였다. 보고 내용을 보면 안흥진의 축언처(築堰處)는 모두 360파(把)이며 작답처(作畓處)는 200여 석락(石落)이 될 것으로 보았다. 방축하는데 들어갈 비용은 15,000냥을 내려가지 않으며 이외에도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판단했다. 많은 물력이 투입됨에도 불구하고 조수가 드나들 고 모래가 퇴적되어서 작답(作畓)의 실효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이를 상주한 김재찬도 형지 (形止)가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며 재력 또한 조달하기 쉽지 않다고 하면서 일 을 착수하지 말 것을 말했다.11)
안흥진 인근 제언의 축조는 1822년(순조 22) 11월, 공청우도 암행어사 이언순의 별단에서도 다 시 등장했다. 어사 이언순은 안흥진은 경기의 목줄기에 있으며 양호(兩湖)의 요해지이지만 이익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백성들이 들어와 살 만한 생활 기반이 없다 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어사 이언순은 안흥진 뒤쪽 10리의 긴 해안이 있는데 지대가 평탄하 니 제언을 쌓으면 적어도 200호 정도의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 장했다. 어사 이언순이 보기에도 안흥진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는 제언 밖에 없던 셈이다.12) 그리 고 제언을 통해 전답이 마련되면 안흥진은 방어영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수 있다고 판 단했다.13)
방어영을 설치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제언의 축조는 1830년(순조 30) 2월, 공충도어사 홍원모의 별단에도 나타났다. 홍원모는 안흥진의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는 인화(人和) 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안흥진 관아 뒤에 제언을 쌓을 만한 곳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쌓아 바다를 막고 백성을 모집해서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는 첨사는 방어사를 겸하여 그 체모를 감당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14)
그러나 그 이후 더 이상 제언 축조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도적으로 시행되 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세기 안흥진의 운영은 별도의 둔전 확보 없이 진행되었다. 19 세기 전반 암행어사들이 지적한 공통된 사항은 안흥진이 그동안 맡아온 역할로 보아 적어도 방어 영으로 승격되어 그에 맞는 규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은 백 성들을 다수 모집하기 위한 전답의 확보하였고 전답 조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방축을 통한 제언답 의 형성에 있었다. 18세기 전반 시도된 이러한 노력은 결국 19세기 전반까지 이어졌으나 끝내 실 패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3. 19세기 중반 안흥진의 운영 양상
제언의 축조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안흥진은 운영되었다. 19세기 중반 작성된 《첩보선집》을 통해 안흥진 운영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첩보선집》은 1848년(헌종 14) 3월 부터 시작하여 1849년(헌종 15) 6월까지 안흥첨사가 작성한 공문기록이다. 모두 1년 3개월 동안 159건의 문서가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은 안흥진에서 발송(發送)한 것이며 일부는 수신(受信)한 것도 확인된다. 이 기간의 안흥첨사는 이종응(李鍾應)과 서전보(徐典輔)이다. 이종응은 1846년(헌 종 12) 11월 부임하였으며, 서전보는 1848년 6월 부임하였다. 상당수는 서전보가 재직시에 남겨 진 기록이다.15)
《첩보선집》의 내용은 크게 안흥진의 재정 수입, 안흥산성의 군병관리, 안흥진 백성에 대한 관리, 안흥군향곡의 운영, 세곡선의 호송과 관리, 이양선의 감시와 해안의 경비, 안흥첨사의 교체 등으 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안흥진의 재정운영과 관련된 내용이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내용은 수군전, 결전, 선무전 등을 미수(未收)한 군현에 대하여 독촉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흥진 재정의 상당 부분을 이들 세원의 상납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제언답 축조를 통한 둔전을 개 설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사실상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재정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 납 재원이 원활하게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상납 독촉은 안흥진첨사의 일상이 될 수 밖 에 없었다.
안흥진의 재정 운영은 1871년에 작성된 《호서읍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안흥진의 전체 재정 수입은 5,192냥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중에서 각 읍을 통해 상납을 받는 것은 거의 90%를 차지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재정 수입은 수군 863명에게서 2냥씩 거둔 수군전(水軍錢)과 수군급대(水軍給代)로 대신 받은 결전(結錢) 865냥으로 전체 합하면 2,591냥이었다.16) 《균역청사 목》에 따르면 충청도 수군의 급대(給代)는 모두 충청도 결전(結錢)을 통해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 기 때문에17) 안흥진의 경우 소속 수군의 급대는 충청도 각 군현에서 상납된 결전 중 일부를 확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당 군현에서 직접 결전을 안흥진에 상납해야 했다.
다음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기병(騎兵) 400명과 별신선 235명에게서 2냥씩 거둔 수 입과 이들의 급대(給代)로 대신 받은 선무군관전(選武軍官錢) 800냥으로 모두 2,070냥이었다. 《균 역청사목》에 따르면 기병 400명에 대해서는 안흥진이 설립된 초기 병조의 기병을 획급받았기 때 문에 병조 기병과 다름이 없기 급대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균역법 시행 당시 안흥진 소속의 기병은 특별하게 급대를 지급받았으며 급대는 충청도 선무군관포 8동으로 대체되었다.18)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결전과 선무군관전은 말할 것도 없고, 수군전 또한 감영이나 수영을 거치 지 않고 각 군현에서 직접 안흥진에 납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부역실총》에 따르면 안흥진에 상 납해야 하는 세목 중에서 기병전 상납 지역은 4곳, 별신선전 상납 지역은 13곳, 수군전 상납 지역 은 13곳, 신선전 상납 지역은 4곳이었다. 안흥진첨사의 위령(威令)이 서지 않으면 상납전이 체납 될 위험이 아주 높았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해당 군현의 상납도 매우 분산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 를 들어 서산군의 경우 기병전 상납은 36명분은 2월에, 24명분은 3월에 이루어졌다. 수군전 상납 은 1명분은 1월, 10명분은 3월, 4명분은 5월, 3명분은 6월, 4명분은 7월, 8명분은 8월, 2명분은 9월, 4명분은 11월, 1명분은 12월에 진행되었다.19) 겨우 서산군에서 안흥진에 납부할 37명의 수 군전 상납이 무려 9개월에 걸쳐 나누어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활하게 상납이 이루어질리 없 었다.
이러한 사례가 《첩보선집》에서는 매우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각 군현의 상납 지연에 대한 문제 는 아래의 문서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① 태안공형에게 보낸 문서 - 수사 신선군의 궐액을 채우는 문제 ② 보령공형에게 보낸 문서 - 보령현에 구획된 선무전의 미수 문제 ③ 해미공형이 보내온 문서 - 결전을 수송하는 문제
④ 서산공형이 보내온 문서 - 서산군의 각년도 번전 문제
⑤ 충청감영에게 보낸 문서 - 문의현에서 결전을 거납(拒納)하는 문제제기
⑥ 문의현령에게 보낸 문서 - 전문(錢文) 127냥을 봉상(捧上)하는 문제
⑦ 충청감영에게 보낸 문서 - 홍주목에서 미수한 번전 213냥을 징수하는 문제 ⑧ 천안공형과 직산공형에게 보낸 문서 - 본현 소재 각삭(各朔_ 미수된 번전 수송 독촉 ⑨ 노성현감에게 보낸 문서 - 각읍의 번포를 수납하고 노성에서 미수된 86냥 징수 ⑩ 충청감영에게 보낸 문서 - 각 읍에서 번포 납부를 지연하는 문제제기
이상의 내용들은 안흥진첨사가 상납 미수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 다. 충청도 각 군현에서 안흥진 소속의 군병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상납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실 상은 그렇지 못했다. 신선군과 수군전처럼 군병의 번전(番錢)을 징수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충청감 영을 대신하여 급대액으로 지급해야 하는 결전과 선무군관전도 제대로 상납되지 못하고 있었다. ⑤번 문서처럼 거납(拒納)하는 경우 해당 군현이 아닌 충청감영에 문서를 보내 감영 차원에서 문 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다. ⑩번 문서는 사실상 충청감영에 현재까지 미수된 현황을 보고하면서 안흥진의 지출 회계가 오로지 번전(番錢)에 달려 있는데 번전의 납부 지연으로 안흥진 재정 운영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내용을 기록하기도 하였다.20)
셋째는 안흥첨사가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안흥진성 내외에 사는 거주민[鎭下居民]을 관리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이 다수 확인된다. 안흥진성 거주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흥진이 위치한 태안 군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1675년(숙종 1) 5월, 안흥진성의 주장(主將)을 첨사로 삼았을 때 태안군 중에서 안흥진성과 가 까운 1개 면(面)을 첨사에게 분급하여 지급하고 관사를 보수하도록 하였으나 태안군수가 방어사 를 겸하여 주장(主將)이 되자 성을 지킬 책임이 태안군수에게 있기 때문에 1개 면을 다시 태안군 소속으로 돌려주었다.26) 적어도 안흥첨사가 관할할 수 있는 곳이 태안군의 1개면이었던 셈인데, 이곳은 지금의 근서면 서쪽 절반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는 안흥면이라고 불렀다.
안흥면 혹은 진하거민의 민호(民戶)는 어느 정도였을까. 1669년(현종 10) 2월, 안흥의 구진(舊 鎭)에 거주하는 있는 백성이 70여 호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1711년(숙종 37) 5월에는 안흥성 중에 거주하는 백성이 불과 30여 호라고 말하기도 하였다.27)
18세기 중반 《여지도서》를 보면 태안군은 모두 9개 면으로 편제되어 있다. 안흥진의 관내에 해 당하는 리(里)는 모두 근서면에 포함되어 있어서 도장동(70호), 신기리(64호), 안파리(65호), 칠포 리(36호), 산성리(296호)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531호로 이들이 안흥진의 관할 민호로 판단된다.28)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따르면 태안군의 호수는 4,094호였다. 면의 구성은 앞 서의 같이 9개 면으로 안흥진 관내에 해당하는 리(里)는 모두 근서면에 있었다. 도장동, 안파리, 칠포리, 중기리, 산성리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29)
1792년(정조 16) 1월, 충청수사 김명우의 첩보를 보면, 안흥진성의 성첩(城堞)을 보수하는 역사 를 1791년(정조 15) 9월부터 시작하여 축성(築城)에 들어가는 돌을 각 호당 세 덩이를 규격에 맞 추어 봉납(捧納)하도록 했는데 당시 동원된 안흥의 민호는 대략 400호 정도였다.30) 이들은 모두 안흥진의 관내에 해당하는 민호로 보인다.
안흥진의 ‘장내(掌內)’라고 표현되는 소속 구역은 모두 7리(里)로 거주하는 민호는 407호이고 여 기에 가의도가 포함되는데 가의도의 민호는 42호였다.31) 《태안군지례》는 1901년(광무 5) 3월에 작성된 자료로 이 자료를 보면 안흥면이 근서면에서 분리되어 나타난다. 안흥진 소속으로 편제된 리(里)가 별도의 면으로 분할된 것으로 판단된다. 안흥면에 해당하는 마을에는 고장동(25호), 도 장동(18호), 항동리(29호), 안파리(15호), 죽림리, 정산리(37호), 신기리(申基里, 17호), 신기리(新 基里, 40호), 가의도(35호)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9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216호이며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죽림리가 더 추가되었을 것이다.32)
1905년(광무 9) 호적표를 보면 당시 각 마을별 호적 내역이 확인된다. 태안군 총 호수는 2,557 호였다. 이 중에서 안흥면의 호수는 152호이고 인구는 396명이었다. 초가(草家)는 541칸으로 확 인된다. 도장리는 12호, 고장리는 21호, 항동은 32호, 신진리는 32호, 성동리는 27호, 신기리는 5호, 정산리는 23호였다.33)
《민적통계표》를 보면 태안군 전체 호수는 7,237호로 이 중에서 안흥면은 395호였다. 태안군 의 전체 인구는 32,643명이며 이중 안흥면 인구는 1,611명이었다. 태안군 농업호는 6,034호로 83.3%를 차지했고 어업호는 807호로 11.1%였다. 안흥면의 경우 농업호가 239호로 60%이며, 어업호는 129호로 32.6%였다. 안흥면은 태안군의 어업호 중에서 비중이 가장 높은 면이었다. 안 면면의 경우 어업호는 236호이지만 비중으로 보면 17.9%에 불과했다. 원일면의 어업호도 128 호로 18.3%였다.34) 이를 통해 안흥면은 태안군 내에서 어업 생활의 비중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35)
《첩보선집》을 보면 안흥진의 장내(掌內) 구역의 리(里)에 여러 가지 문서의 하달이 확인된다. 전 령(傳令)으로 7개 리(里)의 존위(尊位)와 동임(洞任)에게 내려진 문서를 보면 각별히 금단(禁斷)해 야 할 사항과 특히 천주교 문제에 대한 처벌 사실들이 적시되어 있다.36) 또한 성내리와 남문외리 에 내려진 전령에는 일반 군현의 목민관과 같이 금주(禁酒)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 다.37) 이외에도 안흥진의 도선주(都船主)와 각 포구의 민인(民人)에게 내려진 문서에는 외도(外島) 에서 발생하는 민막(民瘼)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과 각 궁방에서 징세(徵稅)를 빙자하여 안흥진 거 주민[鎭民]들에게 소요를 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언급하기도 하였다.38)
사실 안흥진 거주민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될 만한 내용은 진상물 상납(上納)과 관련된 것이다. 《첩보선집》에는 두 종류의 진상물 관련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진상용 생복(生鰒)에 대한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사유환(蛇油丸)이다.
전복은 일찍부터 안흥진 경내 백성들이 내의원에 올리던 진상품이었다. 《내의원식례》에 따르면 내의원에 바치는 물품으로 연례진상(年例進上)과 연례복정(年例卜定)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복은 복정(卜定)에서만 확인된다. 연례복정 중에서 유갑생복(有匣生鰒)은 충청수영과 황해수영에서만 올리도록 하였는데 안흥진은 바로 충청수영에 속하여 해당 진상물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39) 《육 전조례》에 따르면 생복은 2, 3, 8, 9월에만 진상한다고 되어 있다.40)
1632년(인조 10) 6월, 내의원에서는 안흥과 황해도 강령에서 생복(生鰒)을 즉시 보내지 않는다 하여 추고를 한 사실이 확인된다.41) 생복 진상이 고역(苦役)인 이유는 생물(生物)로 올리기 때문에 중간에 상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정퇴(停退)를 당하여 다시 상납이 이루어졌다. 1753년(영조 29)과 1754년(영조 30) 사이에 양전(兩殿)에 올리는 별복정(別卜定)의 생복(生鰒)과 내의원에 올 리는 진상용 생복이 모두 부패하고 상하여 안흥첨사가 처벌받기도 하였다.42)
진상용 생복은 해서수영, 충청수영, 안흥진의 3곳에서 봉진(封進)을 하다가 영조 말년 충청수영 이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1766년(영조 42) 1월, 영조의 수라에 올릴 생물(生物)에 대한 하교에서 충청수영이 제외되고 안흥진에서만 올리도록 하는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43) 이에 따라 영조의 궐 밖 거동[動駕]이 있을 경우 내의원에서는 안흥진에서 올린 생복(生鰒)을 영조의 수라에 바쳤다.44) 《태안군지례》에 따르면 진상 생복은 모두 12개리에서 전담하고 있었다. 이를 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가까운 포구[近浦] 7리(里) : 고장동, 도장동, 항동, 안파리, 칠포리, 정산포, 신진리 먼 포구[遠浦] 5리(里) : 파도리, 모항리, 막동리, 가야항, 대소산리
생복(生鰒)을 채집하는 진상군인(進上軍人)이 생복(生鰒)을 잡아 납부하면 그 값[價米]는 1개당 1 승으로 출급(出給)해 주었다. 관용생복(官用生鰒)의 경우에는 1개당 1분(分)으로 값을 주어 취용 (取用)하였다.45)
이에 따라 안흥진에서는 진상용 생복과 관련하여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40년 (헌종 6) 원진상(元進上)으로 책납(責納)하는 전복 마련 비용을 위하여 분세전(分稅錢)을 징수하였 다. 안흥진항은 8도의 상선(商船)이 반드시 경우하기 때문에 이 중 일부 물건을 방매(放賣)하게 될 경우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항구 주변의 남문외리 백성들에게 특권을 주는 완문(完文)이 발급 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각종 매매 물건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지 액수를 기 재해 두었다. 모두 13개 물목이 해당되었다. 포목(布木), 조(租), 미(米)를 비롯하여 남초(南草), 감 곽(甘藿), 북어(北魚), 청어(靑魚), 석어(石魚) 등이 있었다.46) 이를 통해 마련된 재원은 안흥진 장내주민들이 진상용 생복을 구하는데 사용되었다.
1844년(헌종 10) 10월에는 또 다른 문서가 발급되었다. 진상물을 납부하는 안흥진 거주민[鎭民] 들의 고통이 많아지기 때문에 안흥첨사가 늠전(廩錢)을 덜어내어 50냥을 마련하고 이를 존본취리 (存本取利)를 하여 별공(別貢)에 보용(補用)하도록 한 것이다. 원진상(元進上)의 경우에는 그 수가 많지 않고 이미 앞서와 같이 완문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진상물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 러나 언제 내야할지 모르는 별공(別貢)에 대해서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초둔(草芚)과 염분(鹽盆)에 대한 구문전(口文錢)을 매년 4월과 10월에 거두어서 원획전(元劃錢) 50냥에 첨입(添 入)하고 착실한 자를 가려서 이자를 거두도록 담당하게 하였다.47) 이에 따라 각 염분에는 매좌(每 坐)당 적게는 4전(錢), 많게는 1냥(兩)을 거두었다.
당시 확보한 원전(元錢)은 이후 각 마을에 분급되어 이자를 거둘 수 있도록 했다. 1849년(헌종
15)에 작성된 명단에 따르면, 문동리(8냥8전), 정산리(16냥4전), 고장동(11냥2전), 칠포리(3냥6 전), 안파리(8냥4전), 도장동(11냥6전), 항동리(14냥8전), 신기리(5냥6전), 죽림리(9냥6전), 신진 리(14냥8전)이 분급되었다.48) 모두 109냥 8전이 되어 처음 만들었을 5년 전의 원전 50냥에 비하 여 2배 이상 증액된 사실을 볼 수 있다.
《첩보선집》에 따르면 1849년(헌종 15) 4월경 충청감영으로부터 생복(生鰒)을 진상하라는 지시 가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안흥첨사는 4월 3일 충청감영에 올린 첩보를 통해 안흥진에서 진상군 (進上軍)으로 담당할 호수(戶數)가 매우 부족함을 호소하고 있으면서도 가호에 따라 배분하여 마 련할 것임을 보고하였다.49)
안흥첨사는 5월과 6월 사이에 전령을 통해 각 리(里)에 생복(生鰒)의 진상 방법에 대하여 지시하 였다. 진상의 종류는 두 가지였다. 진하(進賀)에 대한 별복정(別卜定)으로 진상해야 하는 생복(生 鰒)이 하나였고, 대전(大殿) 탄일(誕日)에 맞추어 진상하는 생복(生鰒)이 다른 하나였다. 별복정은 모두 265개를, 대전 탄일은 230개를 올려야 했다. 별복정에 대해서는 1개당 7전5분으로 계산하 여 모두 198냥7전5분을 백성들에게 거두려 하였다. 이 중에서 1/3은 가의도에서 담당하고 2/3 는 육지 마을에서 매호당 4전7분을 거두도록 하였다. 대전 탄일의 경우에는 1개당 5전으로 계산 하여 모두 115냥을 거두려 하였는데 역시 1/3은 가의도에서 담당하고 2/3은 육지 마을에서 매호당 2전7분을 거두도록 했다.50) 가의도가 이와 같이 별도로 구분되었던 것은 태안군 내에서 유일 하게 전복(全鰒)이 생산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51)
안흥진에서 상납하는 또 다른 진상품은 사유환(蛇油丸)이었다. 《내의원식례》에 따르면 연례로 복정(卜定)되는 진상물로서 7월에 상납한다고 되어 있다. 상납 지역은 특정되어 있지 않았다.52) 사 유환 진상은 사실 안흥진이 아닌 태안군에 복정(卜定)된 진상물이었다. 1848년(헌종 14) 7월, 내 의원의 관문에 의거한 충청감영 감결에 보면 감영에서 태안군에 복정한 사유환은 200미(尾)였다. 태안에서는 이를 매호당 능사 1미(尾)를 마련하여 수봉하도록 하고 안흥진 거주민의 경우에는 매 12호당 1미(尾)를 마련하도록 했다.53)
안흥첨사는 사유환 배정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안흥진 질청(作廳)에 내린 하첩(下帖)에서 안 흥첨사는 안흥진에 배정된 5리(里) 중에서 산성리와 칠포리는 공식적으로 줄여주는[公減]하는 예가 있어 제외하고 나머지 신기리, 안파리, 도장동에 대해서는 능사를 비납(備納)하라고 지시하였다.54) 다른 한편으로 태안읍 예방(禮房)에게 보낸 사통(私通)에서는 안흥진 5리에 배정된 46미(尾)에 대하여 일찍이 이러한 일은 없다고 하면서 복정은 태안이 받은 것이지 안흥진이 받은 것이 아니라 고 주장하면서 태안군에서 안흥진에 보낸 복정책자(卜定冊子) 3권을 돌려보내 버렸다.55)
그러나 능사분정등록책자 3권이 다시 안흥진에 도착하자56) 안흥첨사는 태안공형(泰安公兄)에게 보낸 전령(傳令)에서 안흥은 객관(客官)이고 태안은 주관(主官)이지만, 안흥과 태안은 서로 달라 이 미 분계(分界)하였기 때문에 안흥의 분계(分界) 내에서는 안흥첨사가 민생의 질고를 모두 관리한 다고 주장했다.57) 이후 더 이상 관련 내용을 담은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아 결과를 확인할 수 없으 나, 사유환 복정 문제를 통해 태안군과 행정 경계 상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분정을 해야 하는 마을이 구분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58)
넷째는 안흥진과 안흥산성 소속의 환곡 운영과 관련된 문제들이 있다. 일찍이 안흥진에는 산성 축조 이후 군향미가 비축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많은 곡식이 좁은 성에 보관되다 보니 운영의 편리상 안흥산성에 보관된 환곡이 주변 지방으로 이전되기 시작했다.59)
1686년(숙종 12) 10월 병조판서 이사명의 보고에 따르면 1669년(현종 10) 안흥에 있던 군향미 를 평택, 아산, 신창에 옮겨두도록 한 것이 903석에 이르렀다. 이후 또 다시 안흥미 900석을 아산 으로 옮겼다. 그러나 안흥창의 군량 숫자가 많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60) 이후 안흥의 군향미 분급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688년(숙종 14) 4월에는 재해를 입은 고 을에 분급해 주기 위하여 안흥미가 지출되었고61) 1713년(숙종 39) 9월에는 양서 지역의 군량이 부족하자 안흥 군향미 6,000석을 옮겨주었다.62) 1718년(숙종 44) 1월에도 서북 지역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하여 안흥진의 미곡 3,000석이 해서로 이전되었다.63) 당시 제조 민진후는 호서 지역 의 기근으로 믿을 수 있는 곳은 양진창과 더불어 안흥창의 곡물을 언급하였다.6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흥진의 군향미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718년(숙종 44) 1월경에는 30,000석에 이를 정도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군량이 잡곡을 포함하여 10여 만석이었기 때문에 안흥창의 3만석은 적은 양은 아니었다.65) 안흥진에 곡식이 많아지자 오히려 이를 우려하는 목소 리도 등장했다. 그해 9월 태안군수 안서우는 군량은 수만석인데 입방 군사는 수십명에 불과하다 고 하면서 안흥진에 1,000석만 유치(留置)하고 나머지는 연해 고을에 환곡으로 분급하면 근심이 줄어들 것이라 제안했다.66)
이에 따라 불과 10여년 만에 안흥진에 남아 있는 군향미는 10,000석 정도로 줄어들었다.67) 경기 감영에 분급을 하거나 호조 방료(放料)의 부족으로 지급되기도 하였고,68) 충청수사 최진한이 수영의 재정 지출이 어렵다는 이유로 안흥창 군향 10,000석을 이획하여 분치(分置)하기도 했다.69) 1749년(영조 25) 12월 충청감사 홍계희의 장계에 따르면 안흥창의 군향은 모두 15,888석의 규 모였다. 그래서 안흥산성에 창고 3개를 지어 각각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이후 안흥군향미는 매년 방출하고 징수하는 규모를 11,000석으로 규정하도록 하였다.70) 그러므 로 약 4,000석에 대해서는 전류(全留)하여 긴급한 상황에 대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해서 건립된 안흥산성의 군향고는 모두 42칸의 규모에 이르렀다. 1751년(영조 27) 충청감사 이익보는 안흥진성의 동변 체성이 붕괴되었고, 군향고 42칸도 재와(材瓦)가 파손되었다고 하면서 수리를 요청하고 있다.71)
이 시기의 안흥진 군향미는 크게 네 종류로 나뉘어졌다. 첫째는 반분조로 반류반분(半留半分)하 는 환곡이었다. 《곡총편고》에서는 12,435석, 《만기요람》에서는 20,179석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 류반분을 할 때에는 모곡(耗穀) 중 4/5는 원곡에 회록하였고 1/5는 안흥진에서 산성을 관리하는 비용으로 지출할 수 있었다. 둘째는 진분조로 충청감영에서 구관하는 환곡이었다. 《곡총편고》에 서는 195석이 확인되고 《만기요람》에서는 296석으로 나타난다. 전부 환곡으로 분급하여 운영된 다. 셋째는 개석조로 안흥첨향미 171석이 여기에 해당된다. 오로지 개색(改色)을 위한 용도로만 이용되는 환곡이다. 마지막은 전류조로 안흥군향미 중에서 일부를 안흥산성에 무조건 보관해야 하는 군향미이다. 《곡총편고》에는 3,045석이고, 《만기요람》에는 3,989석으로 나타난다. 본래 전 류조만이 안흥산성에 강화도 비축곡을 보관하는 명분에 해당한다. 충청도 전류곡 중 대부분은 바 로 안흥창에 보관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곡 운영에도 불구하고 환곡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첫째는 안흥진 군향 관리 의 문제 중 하나는 환납(還納)하지 못하지 못해 관향곡의 수량이 줄어드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 다. 일찍이 안흥산성의 곡물은 충청도내 진휼곡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었다. 1795년(정조19)에는 태안군에 진휼의 명목으로 군향미 900석이 분급되었다. 그런데 1798년(정조 22)이 되어도 이를 환납하지 못하고 있었다.72)
둘째는 강화부에서 모곡과 원곡을 점차 이송해간다는 점이었다. 강화부에서는 안흥진에 옮겨진 강도 구관의 군향곡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763년(영조 39) 9월 강화유수 정실 은 안흥첨사가 관리하면서 분급된 고을 수령에게 독촉을 해야 하나 첨사의 직급이 높지 않아 수령 들이 이를 다르지 않은 문제를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영의정 홍봉한은 안흥 군향미가 도입된 본 래의 취지가 흐려지면서 충청도 여러 읍에 분산된 사실을 지적했다. 좌의정 윤동도는 이 중에서 1/3을 강화도로 운송하도록 조처하여 결국 일부가 이전되기도 하였다.73)
사실 강화부의 입장에서는 안흥진의 군향이 여러 고을에 분급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반대의 입 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1788년(정조 2) 1월, 강화유수 이복원은 강화 진영에서 급할 때 써야 하 는 것이 안흥군향미인데 원수(元數) 17,000석 중에 안흥진에 남아 있는 것은 4,000석에 불과하다 고 하면서 나머지도 고을에 보관하지 말고 안흥창에 도로 납부하도록 요청하였다.74) 1800년(정조
24) 3월, 강화유수 홍명호는 안흥진에 있는 군향 13,500석은 본래 강화도 군향이기 때문에 그 모 곡 중에서 300석을 본영으로 매년 환획(還劃)하도록 요청하였다.75)
19세기가 되면서 점차 강화유수는 안흥진의 군향곡 관리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 다. 모곡을 강화도로 이속하는 문제는 넘어서서 안흥진 군향을 분급받은 충청도의 각 읍에 대해 서도 바로 수납할 수 있도록 비변사에서 조처를 취해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76) 1856년의 경우 충청도 각지에 산재한 안흥군향미 중에서 덕산, 면천, 목천, 연원역, 직산에 소재한 군향미 원곡 500석을 강화도로 작전(作錢)하여 이송하기도 했다.77)
안흥진의 입장에서 보면 안흥군향곡은 재정 보용을 위한 중요 수단 중 하나였다. 재정 수입 중 에서 안흥군향미 모곡 수입인 안향미대전(安餉米代錢)은 531냥5전5분에 이르렀다. 《곡총편고》에 따르면 안흥군향미의 모곡(耗穀)이 어떻게 활용되었는가가 기록되어 있다. 매석당 모곡 1두5승을 거두는데 이 중에서 80%에 해당하는 1두2승은 원곡에 회록하도록 했다. 19세기 안흥진 환곡 관 련 자료에서도 이자 80%는 모두 원곡에 첨입(添入)한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원칙은 내내 지 켜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나머지 20%에 해당하는 3승은 안흥진에 획급되어 환곡의 감축분과 성첩의 군기를 수보할 때 사용하도록 하였다.78) 그러므로 안흥미대전은 안흥군향미의 이자 수입이 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안흥군향미 이외에 감영 구관의 안흥환미각곡(安興還米各穀) 195석이 존재하였다. 이는 둔 세곡을 조금씩 모아 형성된 것으로 이자의 활용 방식은 안향 군향곡과 동일했다. 이자의 80%에 해당하는 1두2승은 원곡에 회록되었고 20%에 해당하는 3승은 안흥진첨사가 취용(取用)할 수 있 도록 했다.
그러므로 안흥군향미를 안흥진에서는 중요 재정 수입이었기 때문에 관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흥첨사의 지위에서는 그러한 조처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충청감영에 안흥군향미 관련 내역을 정리하여 보고할 수 밖에 없었다.79) 오로지 군향곡의 관리는 충청감영에 의지하고 있 었다.
다섯째는 세곡선의 호송 관련 문제와 치패 관리에 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세곡선 호송과 관 련해서는 우선 호송 구역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1787년(정조 11) 10월, 전(前)충청감사 김 광묵의 장계에 따르면 안흥진이 당시 행영(行營)이었기 때문에 태안군에서 담당해야 할 호송 범위 가 무려 300리에 이르렀다. 문제는 태안의 경우 읍치가 해안과 조금 멀어 물에 익숙하지 못한 격 군이 많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래서 그는 소근진의 경우 의항에서 만대에 이르는 북변 80리를, 행영의 경우 황서에서 의항까지 서변 70리를, 태안은 남변 200리를 담당하도록 하는 구역 설정을 요청하였다.80)

호송 구역 문제는 단순하게 경계를 설정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1793년(정조 17) 6월, 의금부에서는 안흥진 호송 경내에서 취재(臭載)가 발생한 문제에 대하여 태안현감을 조사하 였다. 태안현감의 원정(原情)을 보면 1787년 10월 정해진 호송 구역 경내에 대한 조치를 언급하 고 있지만, 호송이 첨사의 소관이라고 하더라도 태안현 지역에서 벌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태안현 감의 죄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81) 결국 이 문제는 다시 도마 위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1794년(정조 18) 1월, 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좌의정 김이소 는 충청감사와 충청수사의 의견을 수렴한 뒤에 읍(태안)의 폐해를 줄이면 진(안흥)에 해가 되고, 진의 폐해를 줄이면 읍에 해가 된다고 하면서 결국 양쪽이 온전하고 함께 편한 방도가 없음을 피 력하였다. 결국 호송 구역은 그대로 두고, 진(안흥)의 구역에서 치패가 되면 우선 파직하지 말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처리하도록 정리하였다.82)
호송 구역과 별개로 특정 지역에서는 조운 호송 관련 성책을 작성해서 보고해야 했는데 안흥진 은 그러한 몇 개 안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1781년(정조 5) 8월, 호조판서 정민시는 전세와 대동 세를 실은 선척은 법성포, 안흥진, 강화부 세 곳에서 점검을 하고 성책하여 첩보하도록 되어 있다 는 사실을 지적했다. 다만 최근에 강화부에서만 자세하게 보고할 뿐 나머지 두 곳에서는 의례적으 로 보고한다고 하면서 나머지 두 곳도 매월 한 번씩 보고하도록 하고 연해 호송처에서도 감영에 보고하면 감영에서 매월말 합쳐서 성책을 호조와 선혜청에 올리도록 정식화하였다.83)
그러나 성책 보고는 1789년(정조 13) 윤5월 안흥진에서만 점검하는 올리는 것으로 단일화되었 다. 호조판서 서유린과 선혜청당상 이재간은 영남의 세 조창의 조선이 올라올 때 안흥진에서 점검 하는 것은 있었으나 법성진에서 점검하는 것은 유래를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안흥진 이외에서 점검 하는 것은 모두 혁파하도록 주장했다. 다만 안흥진의 경우 본진의 선소(船所)에서 일제히 정박하 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안흥 앞바다의 포구에 도착하면 충청수영우후가 배를 타고 나가 점검하 도록 조처하였다.84)
《첩보선집》에서도 세곡선 호송과 치패 관리, 봉점 성책 보고에 대한 내용들이 확인된다. 경내 호 송이 이루어지게 되면 기본적으로 성책을 작성하여 충청수영과 충청수아영에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호송을 담당하게 되는 도차지(都次知)와 수교리(首校吏), 감색(監色) 등의 성명이 기록된 성 책을 작성하였으며, 충청수영과 수아영에서는 호송선에 대한 봉점(逢點)을 시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치패(致敗)는 1회 발생하였다. 전라도 흥양목장에서 올라온 사복시 상납물에 대한 치패가 안흥진 경내에서 발생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10여 차례 이상 문서들이 안흥진에서 충청 수영, 태안군수, 충청감영 등을 통해 보고되었다.
여섯째는 해안 감시에 대한 내용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점차 다수의 이 양선이 출몰하면서 중앙정부에서도 각별히 주시하고 있었다. 충청감영에서 내려온 이양선의 감 시를 각별하게 거행하도록 한 문서를 통해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85) 안흥첨사는 이를 이행하기위하여 남문외리의 존위, 신진리의 두민, 가의도 존위, 파도지 후망감광에게 각각 이양선의 감시 를 착실히 거행하도록 당부하고 있다.86)
특이한 점은 전라도 지방에서 확인된 이양선을 동선에 따라 감시하도록 한 점이다. 전라감영의 이문에 따른 충청감영의 감결을 보면 대선 4척이 전라도 흑산도에 나타났는데 아국선이 아니기 때문에 타 지역에 나타날 수 있으니 잘 감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안흥첨사는 특별히 원 해(遠海)를 볼 수 있는 파지도와 가의도에 전령을 보내 더 잘 관찰하도록 하고 있다.87)
이외에도 바닷가에 표출된 시신을 수습하여 보고하는 것도 안흥진첨사의 역할이었다. 《첩보선 집》이 작성된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경내에 나타난 시신은 모두 3구로 이는 충청감영과 충청 수영에 각각 보고되었다.
이상과 같이 《첩보선집》에는 19세기 중반 안흥진 운영의 실상이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첨사진으로서 안흥진의 역할이 단순하게 수군진으로서의 모습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모습이 존 재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안흥첨사 가행건이 본 안흥진
안흥첨사를 지낸 인물 중에서 문집 혹은 저서를 남긴 인물은 많지 않다. 이 중에서 눈에 띠는 인 물은 가행건(賈行健, 1798~1865)이다. 그는 1853년(철종 4) 6월, 안흥첨사에 임명되었다.88) 그 리고 안흥첨사에 약 2년 여 간 재임하였다. 그는 《석호집》이라는 문집을 남기면서 선정비(善政碑) 가 건립된 유일한 안흥첨사로 보인다. 그의 문집에도, 그리고 선정비에도 그가 안흥첨사로서 남긴 흔적들이 확인된다.
행장(行狀)에 따르면 그는 안흥첨사에 임명되어 ‘민초들을 자식과 같이 돌보았다. 돌아갈 때 민 초들이 성 동문 안에 마애비(磨崖碑)를 세웠다’고 기록하였는데89) 그 마애비가 선정비로 보인다. 정식 이름은 가행건애민선정비(賈行健愛民善政碑)이다.
가행건의 행적은 가행건애민선정비와 함께 세워진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領議政金公左根 永世不忘碑)이다. 이 비석은 1860년(철종 11) 4월, 안흥첨사 가중영이 세웠다고 한다. 비석 뒷면 에 글이 자세하게 세워져 있는데 가행건의 행적이 여기서 확인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찍이 우리 부친[가행건]께서 먼저 이곳 안흥진성을 지켰었다. 전복 등 해물(海物)을 진상했는 데 태안군에서 사사로이 경영하는 바가 있었다. 이곳 향리와 장교에서 사민(士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분주하게 한양으로 가서 정성을 다하여 마련해야 했다. 이때 우리 대감[김좌근]이 영의정 자 리에 있으면서 인후하신 덕화로 명석한 판단을 크게 내려 영원히 법규로 정했다. 섬 사람과 수부 (水夫)들이 손뼉을 치며 길거리에서 춤추며 찌푸린 주름을 펴게 되었다. 그 덕을 새기고 흠모하는 마음을 더하여 단단한 돌에도 표시하고자 하였다. 내 또한 이곳에 와 있어 그 뜻을 막을 수 없었 고, 비각을 세워 썩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사로이 행한 바가 아니다. 훗날 혹 이곳에 이르는 자는 이것을 궁구하고 살펴볼 것이다.
위 내용은 영의정 김좌근에 대한 칭송을 안흥첨사 가중영이 한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자신 의 부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부친은 바로 가행건을 가리킨다. 가행건이 안흥첨사일 때 영 의정 김좌근에게 요청하여 안흥진에 부과된 진상물 즉, 전복에 대한 진상을 영원이 폐지하도록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이 내용의 구체적인 사실은 안흥첨사 가행건이 영의정 김좌근에게 올린 글인 「안흥관해 록」에 자세하게 나와있다.90) 그는 글에서 안흥진이 위치한 자연 지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안 흥진이 위치한 산은 오서산과 가야산에서 시작한 줄기가 팔봉산이 되고 다시 백화산이 되어 서해 뻗어 나아가는데 그 끝에 성이 만들어져 안흥진성이 되었다고 하였다.
안흥진성 내에 거주하는 민가는 80~90호 정도 되며 안흥진성의 바깥과 주변 섬에 거주하는 민 가는 200여 호가 된다고 하였다. 성 안에는 두 개의 곡물 창고가 있고 3개의 기물(器物) 창고가 있 어서 병기를 저장하고 군수품을 쌓아 놓는다고 하였다. 아마도 곡물창고는 안흥군향곡을 보관하 는 곳이고 기물창고는 군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보인다. 창고가 2~3개 정도되는 것으로 보아 규모 가 매우 작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섬과 육지에는 둔전을 마련하여 해 마다 벼와 보리를 수확하며 매번 100석으로 환곡의 부족을 보충하고 혹 남으면 관용(官用)으로 충당한다고 하였다. 앞서 언급된 것과는 다르게 안흥진에서 운영하는 둔전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를 통해 확보한 수확물이 무려 100석에 이른다는 점 도 알 수 있다. 해당 둔전은 지형상 제언답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거둔 수확물은 환곡으로 나누어주어도 남아서 안흥진의 재정 운영에 보충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안흥진의 재정 살림이 매우 넉넉하다는 점이 확인된다.
안흥진의 백성들은 순박하고 우둔하여 소송하는 일은 드물며 땅이 척박한 소금기가 있는 땅이라 서 키우는 것이 대부분 삐뚤어져 오로지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로 생계를 도모한다고 하였다. 이는 안흥진 관할 백성들의 삶이 대부분 농업이 아닌 어업에 의지한다는 점을 가행건이 안흥첨사를 지 낸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관료들의 경우 모두 연읍에서 조달하여 공양하고 제반 공무에 필요한 것도 대부분 여기에 의지하여 처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흥첨사로서 중요하게 담당해야 하는 일은 밤낮으로 진성을 경계하는 것으로 오로지 방어를 맡 은 군졸을 잘 보살피고 성곽을 삼가 지키며 조운선을 호송하고 소나무 베는 일을 엄하게 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안흥진성은 규모는 작지만 군병이 존재하고 있어서 수성(守城)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과 조운선을 호송하는 업무가 안흥첨사가 주된 일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이한 점은 태국사(泰國寺)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대 뒤에는 태국사가 있는데 수승사군 (帥僧司軍)을 두어 절인 채소와 장(醬)을 공급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본래 조선후기의 대부분의 산 성에서는 산성 내에 사찰을 두고 있었다. 일종의 호국사찰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운영하는 과 정에서 사찰을 건립한 것이 시초를 이룬다. 가행건이 언급한 수승사군은 일종의 의승군(義僧軍)으 로 안흥산성을 수호하기 위한 승병(僧兵)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태국사에서는 안 흥진 관청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채소와 장이 공급된 것으로 보인다.
태국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19세기 전반에 살았던 박윤묵(朴允默, 1771~1849)의 시에서도 확인 된다. 안흥의 태국사 승려 문종(文宗)이 술 한 독을 가지고 동문 밖에 나가는 모습을 그린 시91)와 안흥에 사는 장(張)씨 성을 가진 사람이 글씨를 요구하여 익힌 전복을 안주 삼아 술에 취했다는 시가 확인된다.92) 한편 이진망(李眞望, 1672~1737)의 시에도 안흥성의 태국사에 머물렀다는 내용 이 보인다.93)
이외에도 가행건은 군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안흥진을 잠시 방어영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이를 위하여 5읍의 병졸과 군마를 예속시킨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이는 안흥진에 산성을 축조한 이후 인근 5개읍의 군병을 예속시켜 육군을 편제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안흥진은 바다 남쪽 길의 목구멍이고 내해(內海)에 또 배를 정박하기 적당한 장소이기 때문에 크 고 작은 배가 왕래하여 밤낮으로 거쳐 지나간다는 설명을 통해 안흥진의 항구와 뱃길이 얼마나 북 적이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흥첨사 가행건은 김좌근에게 안흥진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각인시 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일찍이 동국이 천하에 있음을 논하였는데, 안흥이 동국에 있음은 거 의 사람 얼굴에 찍힌 사마귀 하나와 같다’고 하면서 안흥진이 매우 중요한 요충지 임을 주장하고 있다. 안흥의 지세가 낮아 더럽고 움푹 패어 들어간 곳이긴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 쳐야 하기 때문에 부산하게 모여든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저는 사람을 먼저 보고 땅을 나중에 보았습니다. 보는 것이 장차 사람에게 있고 땅에 있지 않기 때문일까요’라고 글을 마친 점이다. 안흥첨사 가행건은 안흥진의 지세의 불 리함 보다는 안흥진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삶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안흥진 백성들에게 주어진 폐단이 크다고 한다면 안흥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폐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안흥진에게 부과된 진상물 문제는 해결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5. 맺음말
19세기 안흥진의 운영은 사실 이전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흥진의 제도 운영은 안정적이 지 않았으며 안흥진에게 부여된 역할은 여전히 크게 남아 있었다. 19세기 전반 암행어사들은 18세기와 마찬가지로 방축을 통한 제언답의 조성을 통해 백성들을 모아 안흥진을 유지하도록 제안 하였다. 실제 이러한 방안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번번하게 실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첩보선집》을 통해 19세기 중반 안흥진의 실상을 읽을 수 있었다. 안흥진의 재정 수입 운영, 군병의 관리, 안흥진 거주민의 삶의 모습, 안흥군향곡의 운영 양상, 세곡선의 호송과 관리, 이양선의 감시와 해안 경비에 대한 안흥첨사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소상하게 볼 수 있었다. 안흥 진의 역할은 18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더 많은 역할이 주어지고 있었다.
1853년 안흥첨사로 임명된 가행건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안흥진을 관리하였다. 그는 지형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관점에서 안흥진 백성들의 폐단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를 실행할 수 있었다. 그가 본 안흥진의 경관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흥첨사로서 주어진 역 할을 수행해야 했고 그가 보기에 우선 순위는 당면한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아 마도 안흥진은 가행건과 같은 관점에서 19세기 말까지 관리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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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신 기자/이재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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