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을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쓸쓸함을 달래는 아주 정겨운 시간으로 여긴다.
외투깃을 잔뜩 올리고 눈 내린 밤길을 걷노라면 회색빛 밤하늘이, 그리운 지난날을 사로잡기도 한다.

깊은 바닷 속에 감추어진 신비의 세상과는 달리 은은히 비추어지는 달빛은 누굴 닮은 미소처럼 흐뭇하게 다가온다.

초롱초롱한 별을 헤며 내 마음을 사로잡으니, 그 또한 정겹고 드넓게 펼쳐진 생생한 모습들과 무채의 얼음, 눈, 바람 모든 것들이 살아있는 것같이 느껴지곤 한다.
회색빛 하늘의 쓸쓸함은 여전하지만 촉촉한 습기 속에, 또 다른 외로움을 잉태하듯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것 같다.

나만이 어둠이 밀려오는 여름밤의 추억에 흠뻑 잠길 때는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도 뇌리에 아른거린다.

모깃불과 발바닥이 갈라지는 무좀과 땀띠와 따가운 뙤약볕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무한한 노력으로 헤쳐 나갔던 그 시절에도 창조의 시간인 동시에 사고의 여유를 주는 밤은, 정녕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동안 키워온 꿈의 열매를 맺고 진실의 과실(果實)을 추구했던 가을 또한 우리에게 베풀어준 위대한 시간이었다.

밤의 고요 속에서 나만이 소유한 하늘의 별빛과 풀벌레소리가 마치 강물 되어 흐른다.

탁한 내해를 사르고 평범하게 흐르는 강물은 왠지 여유가 있어 보이고, 생각하는 질서로 보이고, 내게 베풀어준 유일한 시간들이었다.

또한, 갈피갈피의 사념을 정리하고, 그 생각들을 모아 생의 중요한 일부를 완성하기 위하여 부단히도 애쓰던 시간들이었다.

봄밤의 포근한 미풍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보리밭 길을 거닐면서 강한 생명력을 얻기도 하고, 주저 없이 막무가내로 뛰어가고 싶은 열정을 감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심한 몸부림에 몸이 부서질 것 같아 내심 기억을 잠재우고 싶어 상념에 빠져 시야를 멀리 가져가면,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심한 갈망을 사그려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되도록 속세에서나마 나 자신을 억제할 줄 아는 지혜를 좆아 진실을 배워보기도 했다.

길섶의 풀 한포기가 전하는 사랑과 원칙과 질서의 메시지를 배울 때, 그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부지런한, 근엄함, 침잠과 고요함으로 점철된, 한 단편의 우리는 커다란 가치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우러남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이듯 목마른 사람처럼 영롱한 이슬처럼, 꿈을 갈망하며, 무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느 누구의 지지도 없이 홀로 달려왔건만, 이제야 까마득히 떠오르는 미세한 세월의 무심을 차츰 깨닫게 되는 것은, 젊음이 지나고 나서야 나 자신이 저만큼 달려와 보니, 좀 더 냉철한 판단으로 상처를 다독이며 살아야겠다는 것은 매일 밤을 맞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일차원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의무감, 또는 희생하는 정신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 밤은, 언제나 신선함과 추억에 빠지게 하는 반면, 지나온 시절에 대한 쉼 없는 갈망과, 공허한 외침과, 창백한 달 아래 비추는 내면의 세계에 대한 부단한 그리움으로 사무치게 한다.

하루가 부지런히 열렸다가 서서히 닫혀 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간에 대한 배움의 시간이 커다란 매듭이 지어지는 것과 같이 나의 밤만큼은 아주 낮게, 그리고 근엄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내일도 어김없이 아침이 올 것이고, 밤이 찾아오겠지 또 다른 밤을 맞이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들을 한웅큼 쥐고, 하루의 삶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밤을 마련하여 더 많은, 더 즐거운, 더 특별한 밤을 위안 삼으려한다.

임종복 기자 imjbpr@naver.com 임종복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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